남북국 시대의 전개
7세기 후반,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옛 고구려 땅에 발해가 건국되면서 남쪽의 통일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전개되었습니다. 이 시기는 민족 문화의 폭과 깊이가 더해진 중요한 발전의 시기였습니다.
1. 삼국의 통일 과정과 그 의의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압박에서 벗어나고 통일의 대업을 이루기 위해 당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는 전략적 선택을 했습니다.
[Image of Unified Silla map]1) 나·당 연합의 결성과 백제·고구려의 멸망
- 나·당 연합(648년): 김춘추(태종무열왕)와 김유신의 주도로 당과 군사 동맹을 체결했습니다.
- 백제의 멸망(660년):
- 계백의 결사대가 황산벌에서 패배하고, 수도 사비성이 함락되며 의자왕이 항복했습니다.
- 부흥 운동: 복신, 도침, 흑치상지 등이 저항했으나 내분으로 실패했습니다.
- 고구려의 멸망(668년):
- 연개소문 사후 지도층 내분으로 국력이 약화되어 수도 평양성이 함락되었습니다.
- 부흥 운동: 검모잠, 안승 등이 전개하였고, 신라가 이를 지원했습니다.
2) 나·당 전쟁과 통일 완성
당나라가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도독부, 도호부 설치)을 보이자, 신라는 당을 몰아내기 위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 주요 전투:
- 육지: 매소성 전투에서 당의 대군 격파
- 바다: 기벌포 해전에서 당 수군 섬멸
- 통일 완성(676년): 당의 세력을 축출하고 대동강에서 원산만에 이르는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 의의와 한계:
- 의의: 자주적인 성격의 최초의 통일, 민족 문화 발전의 토대 마련
- 한계: 외세(당)를 이용했다는 점, 영토가 대동강 이남으로 한정됨
💡 핵심 요약: 삼국 통일 순서
- 나·당 연합 → 백제 멸망(660) → 고구려 멸망(668) → 나·당 전쟁(매소성/기벌포) → 삼국 통일(676)
3. 발해의 건국과 해동성국
고구려 멸망 후, 698년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이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에서 건국했습니다. 이로써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열렸습니다.
1) 발해의 발전: 왕권 강화와 영토 확장
발해는 당과 대립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하며 독자적인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 무왕 (대무예): ‘인안’ 연호 사용. 당과 대립하여 장문휴를 보내 산둥반도(덩저우)를 공격하는 등 강경책을 펼쳤습니다.
- 문왕 (대흠무): ‘대흥’ 연호 사용.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3성 6부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옮기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국왕’이라 칭했습니다.
- 선왕 (대인수):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하고 요동으로 진출하여 최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당으로부터 ‘해동성국(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지방 제도: 5경 15부 62주)
2) 발해의 고구려 계승 근거
[Image of Ondol structure]발해는 지배층부터 문화 양식까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지배층: 대다수가 고구려 유민이었으며, 이들이 피지배층(말갈족)을 다스렸습니다.
- 문화적 유사성: 온돌 장치, 기와 무늬, 이불병좌상(불상) 등에서 고구려 양식이 나타납니다.
- 무덤 양식:
- 정혜공주 묘: 고구려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 (모줄임 천장)
- 정효공주 묘: 당나라 양식(벽돌무덤)이지만 평행 고임 천장 등 고구려 요소 혼재
- 외교 문서: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 또는 ‘고려 국왕’이라 칭했습니다.
💡 핵심 요약: 발해 왕들의 키워드
- 무왕(싸움): 인안, 산둥 공격, 당과 적대
- 문왕(교류): 대흥, 3성 6부, 상경 천도, 고려 국왕
- 선왕(전성기): 해동성국, 5경 15부 62주
3. 발해의 건국과 해동성국
고구려 멸망 후, 698년 고구려 장군 출신 대조영이 유민과 말갈족을 이끌고 동모산에서 건국했습니다. 이로써 남쪽의 신라와 북쪽의 발해가 공존하는 남북국 시대가 열렸습니다.
1) 발해의 발전: 왕권 강화와 영토 확장
발해는 당과 대립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하며 독자적인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 무왕 (대무예): ‘인안’ 연호 사용. 당과 대립하여 장문휴를 보내 산둥반도(덩저우)를 공격하는 등 강경책을 펼쳤습니다.
- 문왕 (대흠무): ‘대흥’ 연호 사용.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3성 6부 체제를 정비했습니다.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옮기고, 일본에 보낸 국서에 ‘고려 국왕’이라 칭했습니다.
- 선왕 (대인수): 대부분의 말갈족을 복속하고 요동으로 진출하여 최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당으로부터 ‘해동성국(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이라는 칭호를 얻었습니다. (지방 제도: 5경 15부 62주)
2) 발해의 고구려 계승 근거
[Image of Ondol structure]발해는 지배층부터 문화 양식까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명확히 보여줍니다.
- 지배층: 대다수가 고구려 유민이었으며, 이들이 피지배층(말갈족)을 다스렸습니다.
- 문화적 유사성: 온돌 장치, 기와 무늬, 이불병좌상(불상) 등에서 고구려 양식이 나타납니다.
- 무덤 양식:
- 정혜공주 묘: 고구려 양식인 굴식 돌방무덤 (모줄임 천장)
- 정효공주 묘: 당나라 양식(벽돌무덤)이지만 평행 고임 천장 등 고구려 요소 혼재
- 외교 문서: 일본에 보낸 국서에 스스로를 ‘고려’ 또는 ‘고려 국왕’이라 칭했습니다.
💡 핵심 요약: 발해 왕들의 키워드
- 무왕(싸움): 인안, 산둥 공격, 당과 적대
- 문왕(교류): 대흥, 3성 6부, 상경 천도, 고려 국왕
- 선왕(전성기): 해동성국, 5경 15부 62주
🔥 통일신라, 발해 핵심 암기 실전 문제 (추가중)
1. 다음 사건들을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신라의 김춘추가 당과 군사 동맹을 체결하였다.
(나)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하였다.
(다) 백제 부흥군이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패배하였다.
(라) 신라군이 매소성 전투에서 당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① (가) – (나) – (다) – (라)
② (나) – (가) – (다) – (라)
③ (다) – (라) – (가) – (나)
④ (나) – (다) – (가) – (라)
⑤ (라) – (나) – (다) – (가)
정답: ②
해설: 사건의 발생 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 연개소문의 정변 (642년)
(가) 나·당 동맹 체결 (648년)
(다) 백강 전투 (663년, 백제 멸망 660년 후 부흥군 진압)
(라) 매소성 전투 (675년, 나·당 전쟁 중)
올바른 순서: (나) → (가) → (다) → (라)
2. 다음은 통일 신라의 한 제도를 소개한 내용이다. 이 제도가 시행된 국가의 상황으로 옳은 것은?
자료: 관리의 재직 기간 동안 수조권을 지급하고, 퇴직하거나 죽으면 반납하게 하였다. 이로써 관리가 해당 지역의 토지에 대해 경제적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중앙 집권적 통치 체제를 강화하였다.
• 제도: 관료전
① 장보고가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상 무역을 장악하였다.
② 독서삼품과를 시행하여 유교 경전의 이해 수준에 따라 관리를 채용하였다.
③ 삼대목이라는 향가 모음집이 편찬되었다.
④ 낭혜화상의 비문에서 최치원이 사회 혼란을 비판하였다.
⑤ 왕의 장인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하였다.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자료의 관료전은 신문왕이 녹읍을 폐지하고 지급한 정책입니다. 이는 통일 신라 신문왕의 핵심적인 왕권 강화책입니다. 신문왕은 즉위 직후 장인인 김흠돌의 난을 진압하고 진골 귀족 세력을 숙청하여 전제 왕권을 확립했습니다.
오답 해설:
①, ②, ③, ④는 모두 신문왕이 죽은 후 신라 하대의 혼란기(8세기 후반~9세기)에 발생한 사실들입니다.
3. 다음 자료에서 설명하는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자료: 당(唐)에 유학하여 빈공과에 급제하였다.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격황소서(檄黃巢書)’**를 지어 이름을 떨쳤다. 귀국 후 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렸으나 진골 귀족들의 반대로 수용되지 못하자 관직에서 물러나 해인사에 은거하였다.
① 민며느리제라는 혼인 풍속을 비판하였다.
② 일심 사상과 화쟁 사상을 주장하며 불교 대중화에 힘썼다.
③ 이두를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문자에 기여하였다.
④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여 서역의 상황을 기록하였다.
⑤ 신라 하대의 사회 모순을 지적하고 개혁을 촉구하였다.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자료는 신라 하대에 활동한 6두품 출신 학자 최치원에 대한 설명입니다. 최치원은 진성여왕에게 시무책 10여 조를 올려 신라 하대의 고질적인 사회 모순과 정치 혼란을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오답 해설:
②는 원효의 활동입니다.
③은 설총의 활동입니다.
④는 혜초의 활동입니다.
4. 다음 자료가 설명하는 중앙 관제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자료: 왕명 출납과 군사 기밀을 담당한 **정당성(政堂省)**의 장관인 **대내상(大內相)**이 국정을 총괄하였다. 그 아래 좌사정과 우사정을 두어 행정 실무를 나누어 맡겼다.
① 통일 신라의 9주 5소경을 감독하는 기구였다.
② 이 제도는 발해 문왕 때에 완성되었다.
③ 신라의 독자적인 제도를 반영하여 3성 6부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하였다.
④ 정사암 회의를 통해 국정의 중대사를 논의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⑤ 중정대를 두어 소속 관리를 감찰하게 하였다.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자료는 발해의 중앙 통치 기구인 3성 6부 중 핵심인 정당성에 대한 설명입니다. 발해는 관리 감찰을 위해 중정대라는 독자적인 기구를 두었습니다.
오답 해설:
② 발해의 3성 6부 체제는 문왕 때 정비가 시작되었습니다.
③ 발해는 당의 3성 6부제를 수용했으나 명칭과 운영 방식은 독자적이었습니다.
④ 정사암 회의는 백제의 귀족 회의 기구입니다.
5. 다음 자료에 나타난 국가에서 추진된 정책으로 옳은 것은?
자료: 『발해고』를 저술한 유득공은 “고려가 끝내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아 토문강 북쪽과 압록강 서쪽이 누구의 땅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며 발해를 우리 역사의 일부로 인식하고 신라와 발해가 공존했던 시기를 남북국 시대라고 처음 명명하였다.
① 독서삼품과를 실시하여 유학 교육을 진흥하였다.
②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갖추었다.
③ 지방 제도를 5경 15부 62주로 완성하였다.
④ 청해진을 설치하여 해상 무역을 장악하였다.
⑤ 만부교 사건을 통해 거란과의 관계를 단절하였다.
정답: ③
해설: 자료는 발해를 우리 역사로 인식하는 관점을 제시합니다. 발해는 선왕 때 최대 영토를 확보하며 지방 행정 제도를 5경 15부 62주 체제로 완성했습니다. 이 시기 발해는 **’해동성국’**이라 불렸습니다.
오답 해설:
①, ②, ④는 통일 신라의 정책 및 제도입니다.
⑤는 고려 태조의 정책입니다.
6. 다음은 신라 하대 농민 봉기 중 일부이다. (가)에 들어갈 농민 봉기는?
시기: 신라 하대 (8세기 후반 이후) (가) : 사벌주(지금의 상주)에서 봉기, 세금 독촉에 저항하며 일어남. 농민 봉기 2: 적고적의 난 (붉은 바지 도적들이 봉기)
① 김헌창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② 장보고가 군사를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③ 진성여왕 때 발생하였으며, 중앙 정부의 통제력 상실을 보여주었다.
④ 궁예와 견훤이 후삼국을 건국하는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⑤ 이 사건 이후 최치원이 개혁 방안을 담은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정답: ③
해설: 제시된 (가) 봉기는 원종과 애노의 난입니다. 원종과 애노의 난은 신라 하대 진성여왕 3년(889년)에 사벌주(상주)에서 발생한 대표적인 농민 봉기로, 중앙 정부의 통제력 상실을 보여줍니다.
오답 해설:
① 김헌창의 난(822년)은 귀족의 반란입니다.
② 장보고의 난(846년)은 왕위 쟁탈전에 개입한 사건입니다.
④, ⑤ 원종과 애노의 난은 진성여왕 시기의 혼란을 배경으로 합니다. 이 시기의 사회 혼란이 최치원의 시무책 건의와 궁예/견훤의 후삼국 건국 기반이 되었습니다.
7. 다음 사상을 주장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모든 것은 한마음에서 비롯된다는 일심(一心) 사상을 주장하였다.
• 여러 종파의 사상적 대립을 조화시키려 화쟁(和諍) 사상을 내세웠다.
• ‘나무아미타불’만 외우면 누구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설파하여 불교 대중화에 기여하였다.
①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하여 인도의 상황을 전했다.
② 당에서 유학한 후 화엄종을 개창하고 부석사를 건립하였다.
③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의 저술을 남겼다.
④ 수선사 결사를 이끌며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강조하였다.
⑤ 해동 천태종을 개창하고 교관겸수를 주장하였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통일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에 대한 설명입니다. 원효는 일심 사상과 화쟁 사상을 바탕으로 불교 이론의 통합을 추구했으며, 『대승기신론소』, 『금강삼매경론』 등 수많은 저술을 남겼고, 아미타 신앙을 전파하여 불교 대중화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오답 해설:
①은 혜초입니다.
②는 의상입니다.
④는 고려 시대 지눌입니다.
⑤는 고려 시대 의천입니다.
8. 다음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 발해의 2대 왕이다.
• 독자적 연호로 **’인안(仁安)’**을 사용하였다.
• 영토 확장에 힘써 당(唐)과 대립하였으며, 장문휴를 보내 당의 산둥반도를 공격하였다.
① **’해동성국’**이라 불리며 최대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② 5경 15부 62주의 지방 제도를 완비하였다.
③ 수도를 상경 용천부로 옮기고 3성 6부 체제를 정비하였다.
④ 당과 친선 관계를 맺고 문물을 적극 수용하였다.
⑤ 장문휴를 보내어 당의 등주(산둥반도)를 공격하였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발해의 **무왕(武王)**에 대한 설명입니다. 무왕은 ‘인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며, 당 및 신라와 대립하는 강경책을 펼쳤고, 장문휴 장군을 보내 당의 등주를 공격하게 했습니다.
오답 해설:
①, ②는 선왕(宣王) 때의 사실입니다.
③, ④는 문왕(文王) 때의 사실입니다.
9. 다음 자료가 설명하는 통일 신라의 행정 문서로 옳은 것은?
자료: 일본 도다이사 쇼소인에서 발견되었다. 서원경(청주) 부근 4개 촌락의 인구(성별, 연령별), 토지(논, 밭, 뽕나무 등)의 종류와 면적, 가축의 수까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3년마다 한 번씩 작성되었다.
① 당시의 조세, 공물, 역을 징수했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② 골품제에 따라 신분별로 토지 면적을 제한했음을 증명한다.
③ 왕이 백성에게 토지를 나누어 준 정전(丁田) 지급의 증거이다.
④ 촌주가 왕에게 올린 충성 맹세의 기록이다.
⑤ 장보고의 무역 활동과 교역 품목을 기록한 장부이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통일 신라의 **민정문서(촌락문서)**에 대한 설명입니다. 국가는 이 문서를 통해 촌락의 경제 상황과 노동력 등을 상세히 파악하여 조세, 공물, 역을 효율적으로 징수하고자 했습니다.
오답 해설:
② 골품제를 보여주는 자료는 아닙니다.
③ 정전 지급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습니다.
④는 임신서기석과 같은 맹세의 글이 아닙니다.
⑤는 장보고와 관련 없는 행정 문서입니다.
10. 다음 업적을 남긴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 김춘추의 아들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통일 전쟁을 이끌었다.
• 나당 전쟁에서 승리하여 당의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 통일(676년)**을 완성하였다.
• 죽어서도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며 동해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문무대왕릉)
① 외사정을 파견하여 지방관을 감찰하였다.
② 9서당 10정의 군사 조직을 완비하였다.
③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였다.
④ 국학을 설립하여 유학 교육을 장려하였다.
⑤ 나제 동맹을 체결하여 백제와 연합하였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삼국 통일을 완성한 **문무왕(文武王)**에 대한 설명입니다. 문무왕은 통일 직후 넓어진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고 지방 세력을 통제하기 위해 **외사정(Oesajeong)**이라는 감찰관을 파견하였습니다.
오답 해설:
②, ③, ④는 모두 문무왕의 아들인 신문왕의 업적입니다.
⑤는 5세기 눌지 마립간 때의 사실입니다.
11. (가) 국가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근거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자료: (가)의 지배층 다수는 고구려 유민이었으며,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처하였다.
① 지붕의 기와 모양이 고구려의 것과 유사하다.
② 일본에 보낸 외교 문서에서 ‘고려(고구려) 국왕’이라 칭하였다.
③ 정혜공주 묘는 고구려식 굴식 돌방무덤의 특징을 보인다.
④ 정효공주 묘는 중국 당나라 양식인 벽돌무덤으로 만들어졌다.
⑤ 불상 양식에서 고구려의 것을 계승한 이불병좌상이 발견된다.
해설: (가) 국가는 발해입니다.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증거는 많습니다. 하지만 정효공주 묘가 벽돌무덤 양식으로 만들어진 것은, 고구려 계승의 증거라기보다는 당시 당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당의 문화를 수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물론 묘의 천장 구조 등 일부에는 고구려 양식이 남아있습니다.)
오답 해설:
①, ②, ③, ⑤는 모두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했음을 보여주는 강력한 문화적, 대외적 증거입니다.
12. (가) 제도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자료: (가)는 신라의 신분 제도로, 왕족인 성골과 진골, 그리고 6두품에서 1두품까지의 귀족으로 구성되었다. 이 제도는 개인의 정치적 지위는 물론 일상생활까지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① 6두품은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고 왕이 될 수 있었다.
② 6두품은 관등 승진에 제한이 없었으나 옷 색깔은 구분되었다.
③ 6두품은 ‘아찬’까지만 승진할 수 있었으며 행정 실무를 담당하였다.
④ 6두품은 주로 무예를 담당하고, 진골은 정치를 담당하였다.
⑤ 원성왕 때 독서삼품과가 실시되면서 완전히 폐지되었다.
해설: (가) 제도는 **골품제(Golpumje)**입니다. 골품제 하에서 6두품은 학문적 능력은 뛰어났으나 신분적 한계로 인해 최고 관등인 이벌찬까지 오르지 못하고, 6번째 관등인 ‘아찬’까지만 승진이 가능했습니다. 이들은 주로 중앙 부서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며 왕의 정치적 조언자 역할을 했습니다.
오답 해설:
①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성골(초기)과 진골(중기 이후)뿐이었습니다.
② 6두품은 관등 승진에 제한이 있었습니다.
④ 6두품은 주로 행정/학문, 진골이 정치/군사 요직을 독점했습니다.
⑤ 독서삼품과로 6두품의 불만은 커졌으나, 골품제는 신라 멸망 시까지 유지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