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해방과 대한민국 수립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 6.25 전쟁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꿈에 그리던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그러나 광복의 기쁨은 잠시, 한반도는 이념 대립과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얽힌 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습니다. 이 시기는 분단의 비극을 잉태하고 동족상잔의 전쟁으로 이어진 현대사의 가장 중요한 분기점입니다.

1. 광복 직후의 국내외 정세

1) 국내 정치 세력의 동향

광복 직후 한반도 내에서는 새로운 국가 건설을 위한 다양한 정치 세력들이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크게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대립했습니다.

  • 좌익 세력: 여운형,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가 대표적입니다. 건준은 전국에 145개의 지부를 설치하고 치안대와 인민위원회를 조직하며 행정 공백을 메우는 등 국가 건설에 가장 발 빠르게 나섰습니다. 이후 미군이 진주하기 직전, 건준은 여러 세력을 규합하여 조선 인민 공화국(인공) 수립을 선포했으나, 미군정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 우익 세력: 중국 충칭에서 활동하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하면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김구와 김규식 등이 임정 법통론을 내세우며 정통성을 주장했습니다. 한편, 송진우, 김성수 등 지주와 자본가 계층을 기반으로 한 한국민주당(한민당)은 미군정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익 진영의 중심 세력으로 부상했습니다. 이승만은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조직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습니다.
2) 연합국의 한반도 정책과 38도선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 연합국은 한반도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그 방식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 카이로 회담 (1943):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으나, ‘적절한 시기(in due course)’라는 단서를 달았습니다.
  • 얄타 회담 (1945.2):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결정하면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강대국 간의 논의가 본격화되었습니다.
  • 포츠담 선언 (1945.7): 카이로 회담의 내용을 재확인했습니다.

결정적으로,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미국은 소련의 한반도 전체 점령을 막기 위해 북위 38도선을 기준으로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분담할 것을 제안했고, 소련이 이를 수용했습니다. 이는 본래 일시적인 군사 분계선이었으나, 미소 간의 냉전이 심화되면서 점차 정치적, 이념적 분단선으로 고착화되었습니다.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

1)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와 신탁 통치 논란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서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고 다음 세 가지 사항을 결정했습니다.

  1. 한반도에 임시 민주주의 정부를 수립한다.
  2. 임시 정부 수립을 돕기 위해 미소 공동위원회(미소공위)를 설치한다.
  3. 최고 5년간 미국, 영국, 중국, 소련 4개국에 의한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

이 결정이 국내에 알려지자 엄청난 파장이 일었습니다. 특히 ‘신탁 통치’는 또 다른 식민 지배로 인식되어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 우익 진영 (김구, 이승만 등): 즉각적인 독립을 주장하며 신탁 통치에 결사적으로 반대하는 반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 좌익 진영: 처음에는 반탁 입장이었으나, 소련의 지시에 따라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총체적으로 지지하는 찬탁으로 입장을 선회했습니다. 이로 인해 좌우익의 대립은 극단으로 치달았습니다.
2) 미소 공동위원회의 결렬과 좌우 합작 운동

미소공위는 임시 정부 수립 에 참여할 협의 대상 단체를 놓고 미국과 소련의 의견이 엇갈리면서 두 차례에 걸쳐 결렬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이승만은 1946년 6월, 전라북도 정읍에서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읍 발언을 하여 남한 단독 정부 수립 가능성을 처음으로 공식화했습니다.

분단이 현실화될 것을 우려한 중도파 여운형(좌파)과 김규식(우파)은 이념을 초월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들은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며 미소공위의 속개를 촉구하고 토지 개혁, 친일파 처리 문제 등에서 합의를 이끌어내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극좌, 극우 세력의 반대와 미소 양국의 비협조적인 태도, 그리고 1947년 7월 여운형이 암살되면서 운동은 동력을 잃고 실패로 끝났습니다.

3) UN 이관과 5.10 총선거

미소공위가 최종 결렬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국제연합(UN)에 상정했습니다.

  1. UN 총회 결의 (1947.11): UN 감시 하에 남북한 인구 비례에 따른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2. UN 한국임시위원단 파견: 선거 감시를 위해 위원단을 파견했으나, 소련과 북한이 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했습니다.
  3. UN 소총회 결의 (1948.2):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실시할 것을 결의했습니다.

이 결정은 사실상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의미했습니다. 이에 김구와 김규식 등은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을 발표하며 단독 선거를 격렬히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북한의 김일성, 김두봉과 회담하는 남북 협상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결국 1948년 5월 10일, 제주 4·3 사건의 여파로 2개 선거구를 제외한 남한 전역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민주적 선거인 5.10 총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이 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가 구성되었고, 제헌 국회는 헌법을 제정하고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선출했습니다.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에 북한도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면서 한반도의 분단은 공식화되었습니다.

3. 6.25 전쟁의 배경과 전개

1) 전쟁 이전의 상황

정부 수립 이후 남북은 38도선을 경계로 군사적 긴장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북한은 소련의 지원 아래 군사력을 증강하며 남침 계획을 구체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50년 1월,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이 미국의 극동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으로 설정하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 한반도와 타이완이 제외되었습니다. 이는 북한에게 남침의 기회로 오인될 소지를 제공했습니다.

2) 전쟁의 발발과 전세의 변화
  • 북한의 남침과 낙동강 방어선 (1950.6.25 ~ 8월):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이 38도선 전역에 걸쳐 기습적으로 남침을 감행했습니다. 국군은 제대로 저항하지 못하고 사흘 만에 서울을 빼앗겼으며, 7월 말에는 경상도 일부를 제외한 전 국토를 내주고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했습니다.
  • UN군의 참전과 인천 상륙 작전 (1950.9.15): 북한의 남침을 ‘침략 행위’로 규정한 UN 안전보장이사회는 UN군 파병을 결의했습니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이끄는 UN군은 9월 15일, 전세를 일거에 뒤집는 인천 상륙 작전을 성공시켰습니다. 허리가 끊긴 북한군은 급격히 붕괴되었고, 국군과 UN군은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을 넘어 북진을 계속하여 10월 말에는 압록강까지 진격했습니다.
  • 중공군의 개입과 후퇴 (1950.10 ~ 1951.1): 통일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으나, 1950년 10월 말, 중국 인민 지원군(중공군)이 대규모로 참전하면서 전세는 다시 역전되었습니다. 인해전술에 밀린 국군과 UN군은 후퇴를 거듭하여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을 다시 빼앗기는 1.4 후퇴를 겪었습니다.
  • 전선의 교착과 정전 협상: 이후 서울을 재탈환하고 38도선 부근에서 치열한 공방전이 계속되면서 전선은 교착 상태에 빠졌습니다. 1951년 7월부터 소련의 제안으로 정전 협상이 시작되었으나, 군사분계선 설정과 포로 송환 문제 등으로 2년간 지지부진하게 이어졌습니다. 이승만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며 반공 포로 석방을 단행하기도 했습니다.
3) 정전 협정 체결과 전쟁의 결과

길고 긴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UN군 대표와 북한군, 중공군 대표가 정전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대한민국은 정전 협정의 당사자가 아니었습니다. 6.25 전쟁은 수백만 명의 사상자와 이산가족을 낳았고, 국토 전체를 폐허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남북 간의 적대감을 극도로 심화시켜 분단을 영구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전쟁 이후 대한민국은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게 되었으며, 한미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여 국가 안보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예제 문제 및 정답과해설]


1. 광복 직후 결성된 다음 단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여운형, 안재홍 등을 중심으로 조직되었으며, 전국에 지부를 설치하고 치안대를 조직하여 행정 공백을 메웠다. 미군정 수립 직전에는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기도 하였다.

① 미군정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다.

②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을 주장하였다.

③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에 반대하여 결성되었다.

④ 좌우를 아우르는 통일 국가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였다.

⑤ 송진우, 김성수 등 지주 및 자본가 계층이 주도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자료는 여운형, 안재홍 등이 조직한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에 대한 설명입니다. 건준은 광복 직후 좌우익 인사를 망라하여 조직되었으며, 통일된 민족 국가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였습니다.

[오답 해설] ① 미군정은 건준과 그 후신인 조선 인민 공화국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②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 계승은 김구 등 임정 세력이 주장한 것입니다. ③ 건준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12) 이전에 결성(1945.8)되었습니다. ⑤ 송진우, 김성수 등은 한국민주당을 주도하였습니다.


2. (가) 회의의 결정 내용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1945년 12월, 미국, 영국, 소련의 외무장관이 모스크바에 모여 한반도 문제 해결 방안을 논의하였다. 이 (가) 회의의 결정 사항이 국내에 알려지자, 신탁 통치 문제를 둘러싸고 좌익과 우익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보기>

ㄱ. 미소 공동위원회를 설치한다. ㄴ. UN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한다. ㄷ. 최고 5년간의 4개국에 의한 신탁 통치를 실시한다. ㄹ.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38도선을 설정한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자료는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회의에서는 한반도 임시 민주 정부 수립, 이를 위한 미소 공동위원회 설치(ㄱ), 최고 5년간의 4개국 신탁 통치 실시(ㄷ)를 결정하였습니다.

[오답 해설] ㄴ. UN 감시 하의 남북한 총선거는 미소공위 결렬 후 한반도 문제가 UN으로 이관되면서 결정된 사항입니다. ㄹ. 38도선 설정은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이전에 미국과 소련 간에 합의된 군사 분계선이었습니다.


3. 다음 사건들을 시기순으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이승만이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을 주장하였다. (나) UN 소총회에서 선거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가 결의되었다. (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에서 신탁 통치가 결정되었다. (라) 여운형과 김규식이 중심이 되어 좌우 합작 운동을 전개하였다.

① (다) – (가) – (라) – (나)

② (다) – (라) – (가) – (나)

③ (라) – (다) – (가) – (나)

④ (가) – (다) – (나) – (라)

⑤ (가) – (라) – (다) – (나)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①

해설: 대한민국 정부 수립 과정의 순서를 묻는 문제입니다. (다)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1945.12) → 1차 미소공위 결렬 후 (가) 이승만의 정읍 발언 (1946.6) → 이에 대한 위기감으로 (라) 좌우 합작 운동 전개 (1946.7) → 2차 미소공위 결렬 및 UN 이관 후 (나) UN 소총회의 남한 단독 선거 결의 (1948.2) 순서로 이어집니다.


4. 밑줄 그은 ‘이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미소 공동위원회가 결렬되고 분단의 위기가 고조되자, 중도 세력을 중심으로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이 운동이 시작되었다. 여운형과 김규식은 ‘좌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며 이념을 넘어선 통합을 시도하였다.

① 김구, 김일성 등이 참여한 남북 협상의 일환이었다.

② 반탁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③ 미소 양국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아 성공을 거두었다.

④ 이승만의 정읍 발언 이후 분단을 막기 위해 본격화되었다.

⑤ 5.10 총선거를 통해 제헌 국회를 구성하는 결과를 낳았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자료는 여운형과 김규식이 주도한 ‘좌우 합작 운동’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운동은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고 이승만의 정읍 발언으로 남한 단독 정부 수립론이 대두되자, 이에 위기감을 느낀 중도파들이 분단을 막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전개하였습니다.

[오답 해설]남북 협상은 김구, 김규식이 주도하였습니다. ② 반탁 운동은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 결정 직후 우익 세력을 중심으로 일어났습니다. ③ 좌우 합작 운동은 극좌, 극우 세력과 미소 양국의 비협조로 실패하였습니다. ⑤ 5.10 총선거는 UN 소총회의 결의에 따라 남한 단독으로 실시되었습니다.


5. 5.10 총선거가 남한 지역에서만 실시된 직접적인 원인은 무엇인가?

① 남한 내 단독 정부 수립에 대한 국민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② 북한이 UN 총회의 인구 비례 선거안에 반대하였기 때문에

③ 소련과 북한 측이 UN 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④ 김구 등 민족 지도자들이 남북 분단을 원했기 때문에

⑤ 제주 4·3 사건으로 인해 북한 지역 선거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UN 총회는 남북한 총선거를 결의하고 이를 감시하기 위해 UN 한국임시위원단을 파견하였습니다. 그러나 소련과 북한이 위원단의 북한 지역 진입(입북)을 거부하면서 남북한 동시 선거가 불가능해졌습니다. 이에 UN 소총회는 선거가 가능한 지역, 즉 남한에서만이라도 선거를 치를 것을 결의하게 되었습니다.


6.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하며 활동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

① 독립촉성중앙협의회를 결성하였다.

② 남북 협상을 위해 평양을 방문하였다.

③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④ 한국민주당을 창당하고 미군정과 협력하였다.

⑤ 좌우 합작 위원회에서 우파 대표로 활동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자료는 김구 선생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발표한 「삼천만 동포에게 읍고함」의 일부입니다. 김구는 분단을 막기 위한 마지막 노력으로 김규식과 함께 평양을 방문하여 김일성, 김두봉 등과 남북 협상을 벌였습니다.

[오답 해설]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승만이 조직하였습니다. ③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은 이시영입니다. ④ 한국민주당송진우, 김성수 등이 창당하였습니다. ⑤ 좌우 합작 위원회에서 우파 대표로 활동한 인물은 김규식입니다.


7. 6.25 전쟁 발발의 배경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은?

① 한미 상호 방위 조약 체결

② 애치슨 라인의 발표

③ 반공 포로 석방 단행

④ UN군의 인천 상륙 작전

⑤ 제1차 미소 공동위원회 개최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반도와 타이완을 제외하는 ‘애치슨 라인’을 발표했습니다. 이는 북한과 소련이 미국의 불개입을 확신하고 남침을 결심하게 만드는 하나의 배경이 되었습니다.

[오답 해설]한미 상호 방위 조약은 6.25 전쟁 정전 후에 체결되었습니다. ③ 반공 포로 석방정전 협상 막바지에 이승만 정부가 단행한 조치입니다. ④ 인천 상륙 작전전쟁 발발 후의 사건입니다. ⑤ 미소 공동위원회정부 수립 이전에 개최되었습니다.


8. (가)에 들어갈 군사 작전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6.25 전쟁 초기, 국군은 북한군의 기습 남침으로 낙동강 방어선까지 후퇴하며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그러나 1950년 9월, UN군의 (가) 성공으로 전세를 단번에 역전시키고 서울을 수복할 수 있었다.

① 서울 수복 이후 38도선 이남으로 후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②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전세를 역전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③ 중공군의 참전으로 인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④ 전쟁 발발 직후 국군의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⑤ 정전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한 작전이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가)는 인천 상륙 작전입니다. 이 작전은 북한군의 배후를 공격하여 보급로를 차단하고, 낙동강 방어선에 집중되었던 북한군 주력을 포위 섬멸함으로써 불리했던 전세를 일거에 역전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9. 6.25 전쟁의 전개 과정을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UN군이 후퇴하였다. (나)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3일 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다) 국군과 UN군이 압록강 유역까지 북진하였다. (라) UN군이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서울을 수복하였다.

① (나) – (다) – (라) – (가)

② (나) – (라) – (다) – (가)

③ (다) – (나) – (가) – (라)

④ (라) – (나) – (다) – (가)

⑤ (라) – (다) – (가) – (나)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6.25 전쟁의 전개 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나) 북한의 남침과 서울 함락 → 국군, 낙동강 방어선 구축 → (라) 인천 상륙 작전과 서울 수복 → (다) 국군·UN군의 38도선 돌파 및 북진 → (가) 중공군 개입과 1.4 후퇴 → 서울 재수복 및 38도선 부근 교착 상태 → 정전 협정 체결.


10. 6.25 전쟁의 정전 협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① 이승만 정부가 협상을 주도하였다.

② 포로 송환 문제가 신속하게 합의되었다.

③ 대한민국이 정전 협정의 공식 서명 당사자로 참여하였다.

④ 협정 체결로 남북 간에 평화 체제가 구축되었다.

⑤ UN군, 북한군, 중공군 대표가 서명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⑤

해설: 6.25 전쟁 정전 협정UN군 총사령관, 조선인민군(북한군) 최고사령관, 중국인민지원군(중공군) 사령원 3자가 서명하였습니다. 당시 휴전을 반대했던 이승만 정부의 대한민국은 정전 협정의 서명 당사자가 아닙니다.

[오답 해설]이승만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는 입장이었습니다. ② 포로 송환 문제는 양측의 입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협상이 장기화된 주요 원인이었습니다. ③ 대한민국은 정전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습니다. ④ 정전 협정은 전쟁을 멈추는 군사 협정일 뿐, 평화 체제를 구축한 것은 아닙니다. 한반도는 법적으로 여전히 전쟁 상태입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