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 ·을미개혁
19세기 말 조선은 대내적으로는 봉건 체제의 모순이 심화되고,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이 본격화되는 총체적 위기 상황에 직면했습니다.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아래로부터의 개혁 운동인 동학 농민 운동과 위로부터의 개혁인 갑오·을미개혁이 연이어 일어났습니다. 이 두 사건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국 근대사의 흐름을 결정짓는 중요한 분수령이 되었습니다.
1. 반봉건·반외세의 함성, 동학 농민 운동 (1894)
동학 농민 운동은 부패한 지배층에 저항하고 외세의 침략을 막아내고자 했던 대규모 농민 항쟁입니다.
가. 배경
- 사회·경제적 모순 심화: 세도정치 이후에도 삼정의 문란은 계속되었고, 지방관과 아전들의 수탈은 극에 달했습니다. 특히 개항 이후 일본의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면서 쌀값이 폭등하고 농민의 삶은 더욱 피폐해졌습니다.
- 동학 사상의 확산: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은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바탕으로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메시지를 전파했습니다. 이는 신분 질서에 억눌려 있던 농민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2대 교주 최시형은 교단 조직(포·접제)을 정비하고 『동경대전』, 『용담유사』를 간행하여 교세를 크게 확장했습니다.
- 교조 신원 운동: 정부가 동학을 사교(邪敎)로 규정하고 최제우를 처형하자, 동학 교도들은 교조의 억울함을 풀고 동학 포교의 자유를 요구하는 교조 신원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 운동은 삼례 집회, 서울 복합 상소, 보은 집회를 거치며 점차 정치적인 성격(척왜양창의, 斥倭洋倡義)을 띠게 되었습니다.
나. 제1차 봉기: 반봉건 개혁의 시작 (1894.1. ~ 5.)
- 고부 민란: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이 만석보라는 저수지를 증축하며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는 등 탐학을 일삼자, 전봉준을 중심으로 한 농민들이 봉기하여 관아를 점령했습니다.
- 전국적 확산: 안핵사로 파견된 이용태가 사후 처리를 공정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농민들을 탄압하자, 분노한 농민들은 전봉준의 지휘 아래 다시 봉기했습니다. 이들은 “보국안민(輔國安民)”과 “제폭구민(除暴救民)”을 내걸고 백산에 집결하여 4대 강령을 발표했습니다.
- 황토현 및 황룡촌 전투 승리: 농민군은 정규군인 감영군과 경군을 황토현과 황룡촌 전투에서 연이어 격파하며 기세를 올렸고, 마침내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성을 점령했습니다.
- 전주 화약과 집강소 설치: 농민군의 기세에 놀란 정부는 청나라에 군대 파병을 요청했습니다.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군도 조선에 상륙하자, 외세 개입을 우려한 농민군은 정부와 전주 화약을 맺고 자진 해산했습니다.
- 주요 내용: 농민군은 정부에 폐정개혁안 12개조를 건의했고, 정부는 이를 수용하는 조건으로 농민군의 해산을 요구했습니다.
- 집강소(執綱所): 농민군은 해산 후 전라도 일대에 농민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여 스스로 폐정개혁안을 실천했습니다. 이는 한국사에서 매우 중요한 아래로부터의 개혁 시도였습니다.
- 교정청(校正廳): 정부 역시 자주적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교정청을 설치했습니다.
다. 제2차 봉기: 반외세 항일 투쟁 (1894.9. ~ 12.)
- 봉기 원인: 일본은 조선에서 청나라 군대를 몰아낸다는 명분으로 군대를 철수하지 않고, 오히려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하고 민씨 정권을 축출한 뒤 친일 내각을 수립하여 내정간섭을 본격화했습니다(갑오개혁의 시작).
- 전개: 일본의 침략 행위에 분노한 전봉준의 남접과 최시형의 북접이 연합하여 서울로 북상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일본군을 몰아내는 것이었습니다.
- 우금치 전투와 좌절: 농민군은 충청도 공주의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정부군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으나,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크게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의 패배로 동학 농민 운동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고, 전봉준 등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당했습니다.
라. 의의와 한계
- 의의: 한국 근대사상 최대 규모의 반봉건·반외세 민족 운동으로, 갑오개혁에 영향을 주어 신분제 폐지 등 일부 사회 개혁이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한, 남은 세력은 이후 항일 의병 투쟁에 참여하여 민족 운동의 명맥을 이었습니다.
- 한계: 근대 국가 건설을 위한 구체적인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우세한 외세의 군사력 앞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2. 위로부터의 근대화, 갑오개혁 ·을미개혁
동학 농민 운동을 진압하고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한 일본은 친일 내각을 통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근대적 개혁을 강요했습니다. 이를 갑오·을미개혁이라 부릅니다.
가. 제1차 갑오개혁 (1894. 7. ~ 12.)
- 추진 주체: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내각이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를 설치하여 개혁을 주도했습니다. 이는 초정부적인 회의 기구로, 국왕의 관여를 배제한 채 신속하게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 주요 내용:
- 정치: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 청산(개국 기원 연호 사용), 왕실과 정부 사무 분리, 과거제 폐지, 경무청 설치
- 경제: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 은본위 화폐 제도 채택, 조세의 금납화, 도량형 통일
- 사회: 신분제(공사노비법) 철폐, 조혼 금지, 과부의 재가 허용, 연좌제 폐지
- 핵심: 신분제 폐지는 갑오개혁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동학 농민군의 요구가 일부 반영된 결과입니다.
나. 제2차 갑오개혁 (1894. 12. ~ 1895. 7.)
- 배경: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내정간섭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일본에서 귀국한 박영효가 내각에 참여하면서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이 수립되었고, 군국기무처는 폐지되었습니다.
- 주요 내용:
- 홍범 14조 반포: 고종이 종묘에 나아가 자주독립과 개혁 의지를 담은 홍범 14조(洪範十四條)를 반포했습니다. 이는 한국 최초의 헌법적 성격을 지닌 문서입니다.
- 정치: 의정부를 내각으로 개편(7부), 8도를 23부로 행정 구역 개편
- 사법: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행정부에서 분리
- 교육: 교육입국조서를 반포하고 한성사범학교 등 근대식 학교 설립 추진
다. 을미사변과 을미개혁 (1895. 8. ~ 1896. 2.)
- 배경 (삼국 간섭): 청일전쟁의 결과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차지하자, 러시아·프랑스·독일 3국이 개입하여 일본에 랴오둥반도를 청에 반환하도록 압력을 가했습니다(삼국 간섭). 일본이 굴복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친러 세력이 성장하여 일본을 견제하려 했습니다.
- 을미사변 (1895. 8.): 친러 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주한 공사 미우라 고로의 지휘 아래 낭인들을 동원하여 경복궁에 침입, 명성황후를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 제3차 개혁 (을미개혁): 일본은 을미사변 이후 다시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 주요 내용:
- “건양(建陽)”이라는 연호 제정
- 태양력 사용
- 단발령(斷髮令) 실시
- 종두법 시행, 우편 사무 실시
- 주요 내용:
3. 개혁의 중단과 새로운 위기: 아관 파천
가. 을미의병의 봉기
명성황후 시해와, 특히 유교적 가치관에서 ‘신체발부 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하여 신성시되던 머리카락을 자르라는 단발령은 전국의 유생과 백성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유인석, 이소응 등 유생들을 중심으로 을미의병이 봉기하여 친일 내각 타도와 일본 축출을 외쳤습니다.
나. 아관 파천 (1896. 2.)
을미사변 이후 신변에 극심한 위협을 느낀 고종은 을미의병으로 전국이 혼란한 틈을 타 왕세자와 함께 궁궐을 탈출하여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습니다(아관 파천).
- 결과:
- 김홍집 내각이 붕괴하고 갑오·을미개혁은 중단되었습니다.
- 조선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급격히 강화되었습니다.
- 왕이 외국의 공사관에 머무는 비정상적인 상황 속에서 열강들의 이권 침탈이 본격화되었습니다. 러시아는 광산, 삼림 채벌권을, 미국과 일본 등 다른 열강들도 철도 부설권 등 각종 이권을 차지해 갔습니다.
[예제 문제 및 정답과해설]
1. 다음 격문이 발표된 시기에 있었던 농민군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우리는 의(義)를 들어 여기에 이르렀으니 그 본의는 결코 다른 데 있지 않다. 백성을 도탄 속에서 건지고 국가를 반석 위에 두고자 함이다. 안으로는 탐학한 관리의 머리를 베고, 밖으로는 횡포한 강적의 무리를 몰아내고자 한다.
① 전라도 일대에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였다.
② 일본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하여 서울로 북상하였다.
③ 조병갑의 탐학에 저항하여 고부 관아를 습격하였다.
④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관군을 상대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①
해설: 제시된 격문은 동학 농민군이 백산에 집결하여 발표한 격문의 내용으로, “보국안민”, “제폭구민”의 기치를 내건 제1차 봉기 시점의 상황을 보여줍니다. 제1차 봉기는 정부와의 전주 화약으로 마무리되었으며, 그 결과 농민군은 폐정개혁을 실천하기 위해 전라도 일대에 자치 기구인 집강소를 설치하였습니다.
오답 풀이: ②, ④는 제2차 봉기, ③은 고부 민란 단계의 활동입니다.
2. 다음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친일 내각을 구성하였다. (나) 농민군이 황토현에서 관군에게 크게 승리하였다. (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겼다. (라) 명성황후가 일본 낭인들에 의해 시해되었다.
① (나) – (가) – (라) – (다)
② (나) – (라) – (가) – (다)
③ (가) – (나) – (다) – (라)
④ (가) – (라) – (나) – (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①
해설: (나) 황토현 전투 승리 (1894.4., 1차 동학 농민 운동) (가) 일본의 경복궁 점령 (1894.6., 1차 갑오개혁의 시작) (라) 을미사변 (1895.8.) (다) 아관 파천 (1896.2.) 따라서 시간 순서는 (나) → (가) → (라) → (다)입니다.
3. 밑줄 그은 ‘이 기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정부는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에 파병을 요청하였고, 일본군도 조선에 상륙하였다. 이후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고 내정 개혁을 강요하자, 정부는 이 기구를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기구에서는 신분제 폐지, 재정 일원화 등 200여 건이 넘는 개혁안이 의결되었다.
<보기>
ㄱ. 박영효, 서광범 등 귀국한 개화파가 주도하였다. ㄴ. 고종이 발표한 홍범 14조를 기본 강령으로 삼았다. ㄷ. 왕실 사무와 정부 사무를 분리하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ㄹ. 총재, 부총재, 10여 명의 회의원으로 구성된 초정부적 기구였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ㄹ
④ ㄷ, 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밑줄 그은 ‘이 기구’는 군국기무처입니다. 군국기무처는 제1차 갑오개혁을 주도한 핵심 기구입니다. ㄷ. 군국기무처는 왕실의 정치 개입을 막기 위해 왕실(궁내부)과 정부(의정부)의 사무를 분리했습니다. ㄹ. 군국기무처는 김홍집이 총재를 맡고 10여 명의 회의원이 참여한 초정부적 합의체 기구였습니다.
오답 풀이: ㄱ, ㄴ은 제2차 갑오개혁에 대한 설명입니다. 박영효가 주도하고 홍범 14조를 반포한 것은 제2차 갑오개혁 시기입니다.
4. (가) 개혁의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가) 개혁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세가 굳어진 후 단행되었다.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이 수립되었으며, 국왕은 종묘에 나아가 자주독립 서고문과 홍범 14조를 선포하였다.
① 8도를 23부로 개편하였다.
② 은본위 화폐 제도를 도입하였다.
③ 사법권을 행정권에서 분리하였다.
④ 근대적 교육 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자료는 홍범 14조, 김홍집-박영효 연립 내각 등을 통해 제2차 갑오개혁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① 8도를 23부로 개편한 것은 제2차 갑오개혁의 주요 내용입니다. ③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을 분리한 것도 제2차 갑오개혁의 내용입니다. ④ 교육입국조서를 반포하여 근대 교육의 기틀을 마련한 것도 제2차 갑오개혁 시기입니다.
오답 풀이: ② 은본위 화폐 제도를 도입하고 재정을 탁지아문으로 일원화한 것은 제1차 갑오개혁의 내용입니다.
5. 다음 가상 일기의 배경이 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1895년 O월 O일 나라의 국모를 시해한 것도 모자라, 이제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상투마저 자르라 명하니 통탄할 노릇이다. 이는 짐승의 도리를 강요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차라리 내 목을 자를지언정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 곳곳에서 의로운 선비들이 분노하여 군사를 일으키고 있다.
① 러시아가 프랑스, 독일과 함께 일본을 압박하였다.
② 단발령 실시에 반발하여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③ 군국기무처를 중심으로 개혁 정책이 심의, 의결되었다.
④ 왕이 일본의 위협을 피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일기의 내용 중 ‘국모 시해(을미사변)’와 ‘상투를 자르라는 명(단발령)’을 통해 이 글이 을미개혁 시기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을미개혁의 단발령 실시는 유생층의 격렬한 반발을 사 을미의병 봉기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오답 풀이: ①은 삼국 간섭, ③은 제1차 갑오개혁, ④는 아관 파천에 대한 설명입니다.
6. 동학 농민 운동과 갑오개혁의 관계에 대한 서술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갑오개혁은 동학 농민 운동의 반봉건적 요구를 전혀 수용하지 않았다.
② 동학 농민군의 봉기가 갑오개혁이 중단되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다.
③ 동학 농민 운동의 폐정개혁안은 갑오개혁의 신분제 폐지에 영향을 주었다.
④ 갑오개혁의 추진 세력은 동학 농민군과 연합하여 일본에 대항하고자 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동학 농민 운동은 아래로부터의 개혁 운동이었고, 갑오개혁은 위로부터의 개혁이었지만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특히 동학 농민군이 폐정개혁안에서 주장했던 문벌 타파, 노비 문서 소각 등은 제1차 갑오개혁에서 공사노비법 철폐 및 신분제 폐지로 실현되었습니다. 이는 갑오개혁이 농민들의 개혁 요구를 일부 수용한 것임을 보여줍니다.
7. 지도의 (가)에서 있었던 전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곳에 ‘우금치 전투 지도’ 이미지를 삽입하세요]
①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이 관군을 상대로 첫 대승을 거두었다.
② 농민군이 전라도의 중심지인 이곳을 무혈입성으로 점령하였다.
③ 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의해 농민군 주력 부대가 괴멸되었다.
④ 정부와 농민군 사이에 화약이 체결되어 집강소 설치의 계기가 되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지도에 표시된 (가)는 충청도 공주 지역으로, 이곳에서는 제2차 동학 농민 운동의 최대 격전지인 우금치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전투에서 농민군은 우세한 화력을 지닌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고, 이로 인해 동학 농민 운동은 좌절되었습니다.
오답 풀이: ①은 황토현 전투, ②, ④는 전주성 점령 및 전주 화약에 대한 설명입니다.
8. 다음 조약의 체결이 조선의 정세에 미친 영향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제1조 청국은 조선국이 완전무결한 자주독립국임을 확인한다. 제2조 청국은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 열도를 일본국에 할양한다. (이후 러시아, 프랑스, 독일의 간섭으로 일본은 제2조의 랴오둥반도를 청국에 반환하였다.)
① 최익현이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② 조선 조정 내에 친러 내각이 수립되어 일본을 견제하였다.
③ 동학 농민군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2차 봉기를 일으켰다.
④ 조선 정부가 자주적 개혁을 위해 교정청을 설치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자료는 청일전쟁의 결과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의 내용과 그 이후의 삼국 간섭 상황을 보여줍니다. 삼국 간섭으로 일본이 랴오둥반도를 반환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명성황후를 중심으로 러시아를 이용해 일본을 견제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졌고, 그 결과 친러 내각이 수립되었습니다.
9. 밑줄 그은 ‘이 사건’ 이후에 나타난 사실로 옳은 것은?
을미의병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서울의 방비가 허술해지자, 국왕은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복궁을 떠나 러시아 공사관으로 파천하였다. 이 사건으로 김홍집 내각은 붕괴되고 개화 정책은 일시 중단되었다.
① 통리기무아문이 설치되어 개화 정책을 총괄하였다.
② 러시아가 절영도 조차를 요구하는 등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었다.
③ 군국기무처가 폐지되고 홍범 14조가 반포되었다.
④ 동학 교조의 신원을 요구하는 보은 집회가 개최되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밑줄 그은 ‘이 사건’은 아관 파천(1896)입니다. 국왕이 외국의 공사관에 머무는 비정상적인 상황이 되자, 조선의 주권은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이 틈을 타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들은 각종 이권(광산 채굴권, 삼림 채벌권, 철도 부설권 등)을 요구하여 차지해 갔고, 이권 침탈이 극심해졌습니다. 러시아의 절영도 조차 요구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10. (가), (나) 개혁 시기 사이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가) 개국 503년, 군국기무처를 설치하여 모든 제도를 새롭게 하니, 공사 노비법을 혁파하고 연좌제를 폐지하였다. (나) 건양 원년, 태양력을 사용하고 종두법을 시행하며, 모든 신민에게 머리를 깎도록 명하였다.
① 김기수가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② 명성황후가 일본의 자객에 의해 시해되었다.
③ 운요호 사건을 빌미로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④ 우정총국 축하연에서 정변이 일어나 개화당이 집권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가)는 군국기무처, 공사노비법 혁파, ‘개국’ 연호 사용 등을 통해 제1차 갑오개혁(1894) 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는 ‘건양’ 연호 사용, 태양력, 단발령 등을 통해 을미개혁(1895) 시기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제1차 갑오개혁과 을미개혁 사이에는 제2차 갑오개혁(1894.12~), 삼국 간섭(1895.4.), 을미사변(1895.8.) 등의 사건이 있었습니다. 명성황후가 시해된 을미사변은 을미개혁의 직접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