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대외 항쟁과 원 간섭기( 공민왕 )

고려는 건국 초기부터 14세기 말까지 북방 민족의 끊임없는 침략과 간섭에 맞서며 끈질긴 항쟁의 역사를 이어갔습니다. 거란, 여진, 몽골로 이어지는 대외 항쟁은 고려의 정치, 사회, 문화를 크게 변화시켰으며, 특히 몽골과의 전쟁 이후 약 80년간 이어진 원 간섭기는 고려의 자주성을 심각하게 훼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련 속에서도 고려는 주체성을 잃지 않았고, 공민왕 의 개혁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향한 변화를 모색했습니다.

1. 북방의 위협: 거란(요)의 침입과 격퇴

고려 건국 초기, 북방에서는 거란족이 세운 요(遼)나라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습니다. 고려가 북진 정책을 추진하고 송(宋)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자, 요는 고려를 압박하기 위해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습니다.

  • 1차 침입 (993년, 성종)
    • 배경: 고려의 친송(親宋) 외교 정책과 북진 정책에 대한 불만.
    • 전개: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침입하자,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론과 할지론(땅을 떼어주는 주장)이 대두했습니다.
    • 서희의 외교 담판: 이때 중군사(中軍使) 서희는 거란과의 담판에 나서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이며, 압록강 유역 또한 고려의 영토”임을 주장했습니다. 또한 거란과 국교를 맺지 못한 이유는 여진이 길을 막고 있기 때문이라며, 여진을 몰아내고 길을 확보하면 국교를 맺을 수 있다고 설득했습니다.
    • 결과: 서희의 뛰어난 외교술 덕분에 고려는 싸우지 않고 거란군을 철수시켰으며,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귀주, 곽주)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 2차 침입 (1010년, 현종)
    • 배경: 고려에서 강조의 정변(목종 폐위, 현종 옹립)이 일어나자, 거란은 이를 구실로 삼아 침입했습니다.
    • 전개: 거란의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여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나주까지 피난했습니다. 그러나 양규 등이 흥화진 등에서 거란군에 큰 타격을 주며 분전하여, 거란군은 결국 철수했습니다.
  • 3차 침입 (1018년, 현종)
    • 배경: 고려가 강동 6주 반환 요구를 거부하고, 국왕의 친조(親朝)를 이행하지 않자 거란이 재침입했습니다.
    • 전개 및 결과: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침입했으나, 상원수 강감찬이 흥화진에서부터 적을 막았고, 특히 후퇴하는 거란군을 귀주에서 섬멸하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귀주대첩). 이 승리로 거란은 더 이상 고려를 침략할 의지를 상실했고, 이후 고려, 요, 송 사이의 세력 균형이 유지되었습니다.
  • 전후 대책: 고려는 국방 강화를 위해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고,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았습니다.

2. 동북방의 변화: 여진(금)과의 관계

12세기 초, 만주 지역에서는 여진족이 성장하여 고려의 국경을 위협했습니다.

  • 윤관의 여진 정벌과 별무반
    • 초기 여진족의 침입에 고려군은 기병 중심의 여진군에게 고전했습니다.
    • 이에 숙종 때 윤관의 건의로 특수 부대인 별무반(別武班)을 창설했습니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 보병인 신보군(神步軍),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降魔軍)으로 조직되었습니다.
    • 예종 때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한 후, 동북 지역에 9개의 성(동북 9성)을 쌓아 국경을 확보했습니다.
    • 그러나 여진족의 끈질긴 반환 요구와 수비의 어려움 등으로 인해, 고려는 1년여 만에 동북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었습니다.
  • 금(金)의 건국과 사대 관계 수용
    • 동북 9성을 돌려받은 여진은 세력을 급격히 키워 금(金)나라를 건국하고(1115), 요나라와 북송을 차례로 멸망시켰습니다.
    • 이후 금은 고려에 군신 관계(사대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당시 집권자였던 이자겸 등 문벌 귀족 세력은 무력 충돌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금의 요구를 수용했습니다.

3. 세계 제국의 침략: 몽골(원)과의 전쟁

13세기 초, 칭기즈칸이 몽골 제국을 건설하면서 고려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외부의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 전쟁의 시작과 무신 정권의 항쟁
    • 배경: 고려와 몽골은 강동성에서 거란 유민을 함께 토벌하며 처음 외교 관계를 맺었으나, 몽골 사신 저고여가 귀국길에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몽골은 이를 구실로 고려를 침략했습니다(1231).
    • 강화도 천도: 1차 침입 이후,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는 몽골이 해전에 약하다는 점을 이용해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을 결심했습니다. 이는 백성들의 고통을 외면한 지배층의 결정이라는 비판도 받습니다.
  • 육지에서의 항전:
    • 처인성 전투: 2차 침입 때, 처인 부곡민들과 김윤후가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하여 몽골군을 물리쳤습니다.
    • 충주성 전투: 5차 침입 때, 김윤후의 지휘 아래 노비와 다인철소 주민들이 단결하여 몽골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 문화유산의 소실과 제작:
    • 전쟁 과정에서 황룡사 9층 목탑, 초조대장경 등 귀중한 문화유산이 불에 타 사라졌습니다.
    • 고려는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강화도에서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을 조판했습니다.
  • 삼별초의 항쟁 (1270~1273)
    • 배경: 약 40년간의 전쟁 끝에 무신 정권이 붕괴하고, 고려 정부가 몽골(원)과 강화를 맺고 개경 환도를 결정하자, 이에 반대한 삼별초가 항쟁을 일으켰습니다.
    • 전개: 배중손의 지휘 아래 강화도에서 봉기한 삼별초는 진도로 이동하여 용장산성을 근거지로 삼고 저항했습니다. 진도가 함락된 후에는 김통정이 남은 세력을 이끌고 제주도로 옮겨 항파두리성에서 끝까지 항전했으나, 결국 여몽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습니다.
    • 의의: 삼별초의 항쟁은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지만, 동시에 몽골에 대한 자주적인 항전 정신을 보여준 마지막 저항이었습니다.

4. 원 간섭기의 정치·경제 변화

몽골과의 강화 이후 고려는 원나라의 부마국(사위의 나라)이 되어 약 80년간 내정 간섭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원 간섭기라고 합니다.

  • 정치적 변화: 주권의 상실
    • 영토 상실: 화주(함흥) 지역에 쌍성총관부, 서경(평양) 지역에 동녕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가 설치되어 원의 직접 지배를 받았습니다.
    • 관제 격하: 고려의 독자적인 관제였던 2성 6부는 첨의부, 4사 등으로 격하되었고, 왕을 부르는 칭호(폐하→전하)나 관직명 앞에 ‘충(忠)’자를 붙이는 등 용어가 격하되었습니다.
    • 내정 간섭: 정동행성이 본래의 목적인 일본 원정 이후에도 존속하며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는 기구로 변질되었고, 다루가치라는 감찰관이 파견되었습니다.
    • 권문세족의 등장: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친원파 권문세족이 등장하여 도평의사사를 장악하고, 대농장을 소유하며 막대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 경제·사회적 변화
    • 경제적 수탈: 원은 고려에 금, 은, 인삼 등 막대한 양의 공물을 요구했으며, 특히 매 사냥을 위한 응방(鷹坊)을 설치하여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결혼도감을 통해 공녀를 징발하여 많은 여성이 원으로 끌려갔습니다.
    • 몽골풍과 고려양: 지배층을 중심으로 몽골식 복장(호복), 머리 모양(변발), 음식(소주, 설렁탕) 등 몽골풍이 유행했습니다. 반대로 원나라에서는 고려의 의복, 음식 등이 유행하는 고려양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5. 공민왕 의 반원 자주 개혁

14세기 중반, 원나라가 쇠퇴하고 명나라가 흥기하는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공민왕은 강력한 반원 자주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 반원 자주 정책
    • 친원 세력 숙청: 기황후의 오빠인 기철을 비롯한 부원 세력을 제거했습니다.
    • 몽골풍 폐지: 변발호복을 금지했습니다.
    • 고려 관제 복구: 원 간섭기 때 격하되었던 관제를 원래대로 복구했습니다.
    • 정동행성 이문소 폐지: 대표적인 내정 간섭 기구를 폐지했습니다.
    • 쌍성총관부 수복: 군사를 동원하여 원이 지배하던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자춘, 이성계 부자가 활약했습니다.
  • 왕권 강화 및 민생 안정 정책
    • 신돈 등용: 개혁 추진을 위해 승려 신돈을 등용했습니다.
    • 전민변정도감(田民辨整都監) 설치: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田)와 노비로 만든 백성(民)을 조사하여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양인으로 해방시키는 기구입니다. 이는 권문세족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며 왕권을 강화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 개혁의 좌절과 의의
    • 공민왕의 개혁은 권문세족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고, 신돈이 제거된 후 공민왕마저 시해되면서 결국 실패로 끝났습니다.
    • 하지만 공민왕의 개혁 과정에서 신진 사대부 세력이 성장하여 새로운 개혁 주체로 떠올랐으며, 이는 이후 조선 건국의 사상적, 인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예제 문제 및 정답과해설]


1. 다음 대화에 나타난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쳐들어와서는,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자기들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나: 아닙니다. 우리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입니다.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을 수도로 삼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만약 여진을 몰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돌려준다면 어찌 국교를 맺지 않겠습니까?

① 별무반을 창설하여 여진 정벌을 주도하였다.

② 외교 담판을 통해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획득하였다.

③ 귀주에서 거란의 대군을 격파하여 큰 승리를 이끌었다.

④ 몽골의 침입에 맞서 수도를 강화도로 옮길 것을 건의하였다.

⑤ 정동행성 이문소를 폐지하고 쌍성총관부를 무력으로 수복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대화는 거란의 1차 침입 당시 서희가 소손녕과 벌인 외교 담판의 내용입니다.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워 거란의 침략 명분을 반박하고,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오답 풀이:윤관, ③ 강감찬, ④ 최우, ⑤ 공민왕에 대한 설명입니다.


2. 다음에서 설명하는 군사 조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여진족과의 전투에서 기병 중심의 적에게 고전하자, 숙종 때 창설이 건의되었다. 이 부대는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그리고 승려로 구성된 항마군으로 조직되었다.

① 최씨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 되었다.

② 몽골과의 마지막 항전을 위해 제주도에서 저항하였다.

③ 윤관의 지휘 아래 동북 지역에 9개의 성을 축조하였다.

④ 거란의 3차 침입 당시 귀주에서 적을 물리치는 데 활약하였다.

⑤ 원 간섭기에 조직되어 홍건적과 왜구를 격퇴하는 데 앞장섰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제시된 내용은 별무반에 대한 설명입니다. 별무반은 윤관의 건의로 만들어졌으며, 예종 때 윤관은 이 부대를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축조했습니다.

오답 풀이: ①, ②는 삼별초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는 고려의 중앙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는 신흥 무인 세력에 대한 설명에 해당합니다.


3. (가) 사건 이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가) 몽골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당시 집권자였던 최우는 수도를 강화도로 옮기고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는 섬으로 피신한 지배층과 달리, 육지에 남겨진 백성들에게는 큰 고통을 안겨 주었다.

<보기>

ㄱ. 김윤후가 처인성에서 몽골 장수 살리타를 사살하였다. ㄴ. 부처의 힘으로 국난을 극복하고자 팔만대장경 조판이 시작되었다. ㄷ. 강조가 정변을 일으켜 목종을 폐위하고 현종을 옹립하였다. ㄹ. 거란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압록강 하구에서 천리장성이 축조되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①

해설: (가)는 강화도 천도(1232년)입니다. 이 사건 이후에 일어난 사실을 고르는 문제입니다.

오답 풀이: ㄱ. 처인성 전투는 강화도 천도 직후인 1232년(몽골 2차 침입)에 있었습니다. (옳은 설명) ㄴ. 팔만대장경(재조대장경) 조판은 몽골의 침략으로 초조대장경이 소실된 후, 강화도에서 1236년부터 1251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옳은 설명) ㄷ. 강조의 정변(1009년)은 거란의 2차 침입 원인이 된 사건으로, 몽골 침입보다 훨씬 이전입니다. ㄹ. 천리장성 축조는 거란의 3차 침입 이후인 11세기 초에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가) 이후의 사실은 ㄱ과 ㄴ입니다.


4. 다음 자료가 설명하는 저항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정부가 몽골과의 강화를 맺고 개경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자, 이들은 “몽골과 끝까지 싸우겠다”며 반발하였다. 배중손의 지휘 아래 봉기하여 진도로 근거지를 옮겼으며, 진도가 함락된 후에는 김통정이 남은 무리를 이끌고 제주도에서 항전하였으나 결국 진압되었다.

① 서경 천도를 주장하며 ‘칭제건원’을 내세웠다.

②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과 노비 문제 해결을 목표로 하였다.

③ 거란의 침략에 맞서 싸운 무신 정권의 군사적 기반이었다.

④ 반원 자주 정책을 내세운 공민왕의 개혁을 지지하였다.

⑤ 개경 환도에 반대하며 대몽 항쟁을 이어갔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자료는 삼별초의 항쟁에 대한 설명입니다. 삼별초는 고려 정부의 개경 환도 결정에 반대하여 강화도 → 진도 → 제주도로 근거지를 옮기며 몽골(원)에 대한 항쟁을 지속했습니다.

오답 풀이: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 전민변정도감의 역할입니다. ③ 삼별초는 무신 정권의 군사 기반이었으나 항쟁 대상은 몽골이었습니다. ‘거란’이 틀린 설명입니다. ④ 공민왕의 개혁은 삼별초 항쟁 이후의 일입니다.


5. 다음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강감찬이 귀주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나) 윤관이 별무반을 이끌고 동북 9성을 축조하였다. (다) 배중손이 이끄는 삼별초가 진도에서 항전하였다. (라) 공민왕이 군사를 보내 쌍성총관부를 수복하였다.

① (가) – (나) – (다) – (라)

② (가) – (다) – (나) – (라)

③ (나) – (가) – (다) – (라)

④ (나) – (다) – (가) – (라)

⑤ (다) – (라) – (가) – (나)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①

해설: 각 사건의 시기를 파악하는 문제입니다. (가) 귀주대첩: 1019년 (현종) (나) 동북 9성 축조: 1107년 (예종) (다) 삼별초의 진도 항전: 1270년~1271년 (원종) (라) 쌍성총관부 수복: 1356년 (공민왕) 따라서 시간 순서는 (가) → (나) → (다) → (라) 입니다.


6. 밑줄 그은 ‘이 시기’의 모습으로 옳지 않은 것은?

고려는 몽골과 강화를 맺은 후 원의 부마국이 되었다. 국왕은 원의 공주와 혼인해야 했고, 관제와 용어가 격하되는 등 국가의 위상이 크게 떨어졌다. 이 시기에는 원의 세력을 등에 업은 자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백성들을 수탈하였다.

① 정동행성이 내정 간섭 기구로 변질되었다.

② 지배층을 중심으로 변발과 호복 등 몽골풍이 유행하였다.

③ 권문세족이 도평의사사를 장악하고 대농장을 소유하였다.

④ 매 사냥을 위한 응방이 설치되어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⑤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개경에 나성을 축조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⑤

해설: 밑줄 그은 ‘이 시기’는 원 간섭기입니다. ①, ②, ③, ④는 모두 원 간섭기에 나타난 정치, 사회적 특징입니다. 정동행성, 몽골풍, 권문세족, 응방은 원 간섭기의 대표적인 키워드입니다.

오답 풀이: ⑤ 개경에 나성을 축조한 것은 거란의 침입을 격퇴한 후인 현종 때의 일로, 원 간섭기보다 훨씬 이전의 사실입니다.


7. 다음 정책을 추진한 국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권문세족이 불법으로 빼앗은 토지와 노비를 본래의 주인에게 돌려주거나 양인으로 해방시키기 위해 개혁 기구를 설치하였다. 이 기구의 책임자로 신돈을 임명하여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나, 기득권층의 거센 반발에 부딪혔다.

① 별무반을 편성하여 여진에 대비하였다.

② 12목을 설치하고 지방관을 파견하였다.

③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④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였다.

⑤ 화폐 유통을 위해 해동통보, 삼한통보 등을 발행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자료는 공민왕이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공민왕의 다른 업적을 찾으면 됩니다. 공민왕은 반원 자주 정책의 일환으로 기철 등 친원 세력을 숙청하고, 무력을 동원해 쌍성총관부를 수복했습니다.

오답 풀이: ①, ⑤는 숙종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는 성종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은 광종에 대한 설명입니다.


8. 몽골이 고려를 침략하는 구실이 된 사건은 무엇인가?

① 강조의 정변

② 이자겸의 난

③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④ 몽골 사신 저고여 피살 사건

⑤ 위화도 회군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몽골은 고려와 함께 강동성에서 거란 유민을 토벌한 후 고려에 과도한 공물을 요구했습니다. 이후 몽골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근처에서 피살되자, 몽골은 이를 구실로 삼아 1231년 고려를 처음 침략했습니다.

오답 풀이: ①은 거란의 2차 침입 구실입니다. ②, ③은 12세기 문벌귀족 사회의 동요입니다. ⑤는 조선 건국의 계기가 된 사건입니다.


9. (가) 인물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______은(는) 몽골의 2차 침입 때 처인성에서 적장 살리타를 사살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5차 침입 때에는 충주 방호별감으로 임명되어, 노비 문서를 불태우며 노비들을 독려하여 충주성을 지켜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① 삼별초를 이끌고 진도에서 항전하였다.

② 귀주에서 거란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③ 서희와의 외교 담판을 벌인 거란의 장수였다.

④ 강화도로 수도를 옮겨 장기 항전을 준비하였다.

⑤ 몽골과의 전쟁에서 뛰어난 활약을 한 하급 관리 출신 장수이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자료는 김윤후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는 처인성 전투와 충주성 전투에서 몽골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이끈 인물로, 신분이 낮은 하급 관리 출신이었습니다. 이러한 그의 활약은 당시 지배층뿐만 아니라 하층민들도 몽골에 맞서 싸웠음을 보여줍니다.

오답 풀이:배중손, ② 강감찬, ③ 소손녕, ④ 최우에 대한 설명입니다.


10. 고려의 대외 항쟁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모두 고른 것은?

ㄱ. 서희는 귀주에서 외교 담판을 벌여 강동 6주를 획득했다. ㄴ. 윤관은 별무반을 이끌고 여진을 정벌하여 동북 9성을 쌓았다. ㄷ. 몽골 침략기에 황룡사 9층 목탑이 소실되고 팔만대장경이 조판되었다. ㄹ.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찬성하여 여몽연합군과 함께 제주도의 저항 세력을 진압했다.

① ㄱ, ㄴ

② ㄴ, ㄷ

③ ㄷ, ㄹ

④ ㄱ, ㄷ, ㄹ

⑤ ㄴ, ㄷ, 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오답 풀이: ㄱ. 서희가 외교 담판을 벌인 것은 사실이나, 장소는 귀주가 아닌 거란의 군영이었습니다. 강동 6주를 획득한 것은 맞지만, 장소에 대한 설명이 틀렸습니다. (귀주에서 승리한 인물은 강감찬입니다.) ㄴ. 옳은 설명입니다. ㄷ. 옳은 설명입니다. 몽골 침략 과정에서 많은 문화재가 소실되었고, 이를 극복하려는 염원을 담아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졌습니다. ㄹ. 삼별초는 개경 환도에 ‘반대‘하여 항쟁을 일으켰으므로 틀린 설명입니다. 따라서 옳은 설명은 ㄴ과 ㄷ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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