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사회의 전개(대한제국)

1. 대한제국 수립과 국권 수호 운동

아관파천 이후,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는 가운데 국가의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향한 열망은 더욱 커져 갔습니다. 이러한 시대적 요구 속에서 고종은 환궁하여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근대적 개혁을 추진했으며, 지식인들은 독립 협회를 중심으로 자주독립과 자유 민권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은 노골화되었고, 대한제국 은 국권을 지키기 위한 처절한 저항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1. 자주독립과 근대화를 향한 열망: 독립 협회의 활동

1896년,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창간한 『독립신문』은 독립 협회 활동의 서막을 열었습니다. 순 한글판과 영문판으로 발간된 이 신문은 국민 계몽과 자주독립 의식 고취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1) 독립 협회의 창립과 초기 활동

『독립신문』의 창간을 계기로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 개화파 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 협회를 창립했습니다(1896). 이들의 초기 목표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 자주독립의 상징 건립: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을 헐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습니다. 이는 사대주의를 청산하고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임을 선언하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또한, 중국 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토론회와 강연회 장소로 활용했습니다.
  • 국민 계몽 활동: 독립관을 중심으로 강연회와 토론회를 개최하여 국민의 권리, 참정권, 서구의 근대 사상 등을 전파하며 국민 계몽에 앞장섰습니다.
(2) 만민 공동회와 국권 수호 운동

독립 협회는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의 이권 침탈이 심화되자, 서울 종로에서 만민 공동회를 개최하여 이를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만민 공동회는 학생, 상인, 지식인 등 각계각층의 시민이 참여한 대중 집회로, 한국 역사상 최초의 근대적 민중 집회로 평가받습니다.

  • 주요 활동:
    • 이권 수호 운동: 러시아의 재정 고문 및 군사 교관 파견 철수, 절영도(부산 영도) 조차 요구 저지 등 열강의 이권 침탈에 맞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 자유 민권 운동: 국민의 신체의 자유, 재산권 보호,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기본권 보장을 요구했습니다.
(3) 관민 공동회와 헌의 6조

만민 공동회의 활동이 고조되자, 박정양 등 일부 개혁적 성향의 정부 관료들이 참여하는 관민 공동회로 발전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독립 협회는 국정 개혁안인 헌의 6조를 결의하여 고종에게 건의하고 재가를 받았습니다.

<사료 탐구: 헌의 6조의 핵심 내용>

1. 외국에 의존하지 말고 관민이 합심하여 전제 황권을 공고히 할 것.

2. 이권에 관한 조약은 각부 대신과 중추원 의장이 합동 날인하여 시행할 것.

3. 모든 재정은 탁지부에서 관할하고, 예산과 결산을 국민에게 공포할 것.

4. 중대 범죄는 공판하고, 피고의 인권을 존중할 것.

5. 칙임관은 황제가 정부에 자문하여 과반수의 동의를 얻어 임명할 것.

6. 정해진 규정을 실천할 것.

헌의 6조는 의회 설립(중추원 개편)내각 책임제적 요소를 담고 있어, 전제 군주제를 입헌 군주제로 바꾸려는 시도였습니다. 고종은 이를 수용하여 중추원을 의회식으로 개편하는 관제를 반포했으나, 보수 세력의 반발과 독립 협회가 공화정을 추구한다는 모함으로 인해 결국 해산되고 맙니다.

(4) 독립 협회의 해산과 의의

보수 세력은 어용 단체인 황국 협회를 동원하여 만민 공동회와 물리적 충돌을 일으켰고, 정부는 이를 빌미로 독립 협회 간부들을 체포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강제 해산시켰습니다(1898).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독립 협회는 자주 국권, 자유 민권, 자강 개혁을 목표로 민중과 함께한 최초의 근대적 정치 사회 운동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를 지닙니다.

2. 대한제국과 광무개혁 (1897~1904)
(1) 대한제국의 성립

아관파천 이후 독립 협회와 수구파 양측으로부터 환궁 요구가 거세지자, 고종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으로 환궁했습니다. 이후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하고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여 자주독립 국가임을 국내외에 선포했습니다.

(2) 광무개혁의 기본 방향: 구본신참(舊本新參)

대한제국이 추진한 개혁을 광무개혁이라 부릅니다. 광무개혁의 기본 원칙은 ‘옛것을 근본으로 삼고 새로운 것을 참고한다’구본신참(舊本新參)이었습니다. 이는 갑신정변이나 갑오개혁의 급진성을 경계하고, 점진적인 개혁을 통해 강력한 전제 황권을 바탕으로 국방, 산업, 교육 등 각 분야를 근대화하려는 목표를 가졌습니다.

(3) 광무개혁의 내용
  • 정치: 1899년, ‘대한국 국제(大韓國 國制)’를 반포하여 황제가 무한한 군주권을 가지는 전제 군주국임을 명시했습니다. 이는 의회 설립과 입헌 군주제를 지향했던 독립 협회의 노선과는 정반대되는 것이었습니다.
  • 군사: 황제가 군권을 직접 장악하기 위해 최고 군 통수 기관인 원수부(元帥府)를 설치하고, 시위대와 진위대를 증강하는 등 군비 확충에 힘썼습니다.
  • 경제:
    • 양전·지계 사업: 국가 재정 확보와 근대적 토지 소유권 확립을 위해 양지아문을 설치하여 전국의 토지를 측량하는 양전 사업을 실시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토지 소유자에게 근대적 토지 소유 문건인 지계(地契)를 발급했습니다. 지계아문에서 발급한 지계에는 토지의 면적, 소유권 등이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 식산흥업 정책: 근대적 공장과 회사 설립을 적극 지원했습니다. 섬유, 철도, 금융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근대적 기업이 나타났습니다.
  • 사회·문화: 기술 교육의 필요성을 인식하여 상공학교, 의학교 등 각종 실업 학교를 설립하고, 해외 유학생을 파견했습니다.
(4) 의의와 한계

광무개혁은 자주적으로 국가의 실력을 키우려 한 개혁이라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특히 지계 발급은 근대적 토지 소유 제도를 확립하려는 중요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황권 강화에만 치중하여 민권 신장에 소홀했고, 보수적이고 점진적인 개혁으로 인해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러일전쟁 이후 일본의 본격적인 국권 침탈로 인해 중단되고 말았습니다.

3. 일제의 국권 침탈 과정과 한일 병합

러일전쟁(1904~1905)에서 승리한 일본은 대한제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확보하고, 체계적으로 국권을 침탈하기 시작했습니다.

(1) 러일전쟁 중의 국권 침탈
  • 한일 의정서 (1904.2): 일본은 전쟁 수행을 명분으로 대한제국의 영토를 군용지로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대한제국의 주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첫 조치였습니다.
  • 제1차 한일 협약 (1904.8): 일본은 재정 고문으로 메가타, 외교 고문으로 스티븐스를 파견하여 대한제국의 재정과 외교에 깊숙이 개입했습니다. 이를 ‘고문 정치’라고 부릅니다.
(2) 외교권 박탈: 을사늑약 (제2차 한일 협약, 1905.11)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미국), 제2차 영일 동맹(영국), 포츠머스 조약(러시아)을 통해 열강으로부터 한반도 지배를 인정받았습니다. 이를 배경으로 일본은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조약을 체결했습니다.

  • 주요 내용:
    1.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2. 서울에 통감부(統監府) 설치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 을사늑약에 대한 저항:
    • 언론: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실어 조약의 부당함을 알리고 격렬히 비판했습니다.
    • 지식인 및 관료: 민영환, 조병세 등은 조약 폐기를 상소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자결로써 항거했습니다.
    • 무력 투쟁: 민종식, 최익현 등 유생들이 을사의병을 일으켰습니다.
    • 외교적 노력: 고종은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여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일본의 방해로 실패하였고, 이를 빌미로 일본은 고종을 강제 퇴위시켰습니다.
(3) 내정 장악과 강제 병합
  • 한일 신협약 (정미 7조약, 1907.7): 고종 퇴위 직후, 일본은 통감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여 대한제국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 내정을 직접 장악했습니다(차관 정치). 이 조약의 비밀 각서에 따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었습니다.
  • 군대 해산과 정미의병: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전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습니다(정미의병).
  • 사법권 및 경찰권 박탈: 일본은 1909년 사법권을, 1910년에는 경찰권을 차례로 빼앗았습니다.
  • 한일 병합 조약 (1910.8.29): 일본은 친일 내각을 앞세워 대한제국의 통치권을 완전히 일본에 넘긴다는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로 만들었습니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예제 문제 및 정답과해설]


1. 다음 조약의 (가) 조항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제1관. 조선국은 자주(自主)의 나라로 일본국과 동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 (중략) … 제7관. 조선국 연해의 도서(島嶼)와 암초(暗礁)는 지극히 위험하므로 일본국 항해자가 수시로 해안을 측량하는 것을 허가한다. 제10관. 일본국 인민이 조선국 항구에서 죄를 지은 사건은 모두 일본국 관원이 심판한다.

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하려는 일본의 의도가 담겨 있다.

②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③ 일본 상품에 대한 무관세 특혜를 명시한 조항이다.

④ 일본 공사관의 경비병 주둔을 허용하는 근거가 되었다.

⑤ 조선이 외국과 최초로 체결한 근대적 조약의 시작을 알렸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자료는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입니다. 제1관에서 조선을 ‘자주국’으로 명시한 것은 표면적으로 조선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 의도는 조선이 청나라의 속국이 아님을 국제적으로 공인시켜 청의 영향력을 차단하고 일본의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오답 해설: ① 일본은 조선의 완전한 독립이 아닌, 자국에 예속시키려는 의도를 가졌다. ③ 무관세 조항은 강화도 조약 본 조약이 아닌, 이후 체결된 조일무역규칙에 명시되었습니다. ④ 공사관 경비병 주둔은 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제물포 조약의 내용입니다. ⑤ ‘조선이 외국과 최초로 체결한 근대적 조약’은 강화도 조약 전체에 대한 설명이며, 제1관 조항 자체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합니다.


2. 다음 사건들을 일어난 순서대로 올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김옥균 등이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켰다. (나) 운요호가 강화도에 접근하여 포격 사건을 일으켰다. (다) 구식 군인들이 차별 대우에 반발하여 봉기하였다. (라) 황준헌의 『조선책략』 유포에 반발하여 영남 유생들이 상소를 올렸다.

① (나) – (다) – (라) – (가)

② (나) – (라) – (다) – (가)

③ (다) – (나) – (가) – (라)

④ (라) – (나) – (다) – (가)

⑤ (라) – (다) – (나) – (가)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각 사건의 발생 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 운요호 사건: 1875년. 이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 조약(1876)이 체결됩니다. (라) 영남만인소: 1881년. 2차 수신사 김홍집이 가져온 『조선책략』의 유포에 반발하여 일어났습니다. (다) 임오군란: 1882년. 구식 군인에 대한 차별 대우가 원인이었습니다. (가) 갑신정변: 1884년. 급진개화파가 주도하였습니다. 따라서 순서는 (나) → (라) → (다) → (가)입니다.


3. 다음 자료에 나타난 사건의 결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별기군에 비해 푸대접을 받던 구식 군인들은 밀린 봉급을 겨와 모래가 섞인 쌀로 받자 분노가 폭발하였다. 이들은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을 파괴하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다. 사태가 커지자 명성황후는 궁을 탈출하였고,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재집권하였다.

<보기>

ㄱ. 청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었다. ㄴ. 텐진 조약이 체결되는 배경이 되었다. ㄷ. 일본 공사관 경비를 명목으로 일본군이 주둔하게 되었다. ㄹ. 재정을 호조에서 일원화하자는 개혁안이 발표되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자료는 구식 군인들의 봉기,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등을 통해 임오군란(1882)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오군란의 결과, 민씨 정권의 요청으로 개입한 청나라의 내정 간섭이 심화되었고(ㄱ), 일본과는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여 배상금 지불 및 공사관 경비병 주둔을 허용하게 되었습니다(ㄷ).

오답 해설: ㄴ. 텐진 조약갑신정변(1884)의 결과로 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되었습니다. ㄹ. 재정을 호조에서 일원화하자는 개혁안은 갑신정변 당시 급진개화파가 발표한 14개조 정강의 내용입니다.


4. 밑줄 그은 ‘이 운동’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이 운동은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고 서양 및 일본 세력을 배척하려는 보수 유생층 중심의 정치 운동이었다. 1870년대 최익현은 왜와 서양은 하나라는 ‘왜양일체론’을 주장하며 개항에 반대하였고, 1880년대에는 이만손 등이 미국과의 수교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기도 하였다.

① 1860년대에는 척화주전론을 주장하며 통상에 반대하였다.

②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비판하였다.

③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 의병 투쟁으로 이어졌다.

④ 정부의 개화 정책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⑤ 반외세, 반침략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밑줄 그은 ‘이 운동’은 위정척사 운동입니다.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를 배격하고 전통 질서를 수호하려 했으므로,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척화 정책)을 지지하고 옹호하는 입장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를 비판했다는 설명은 옳지 않습니다.

오답 해설: ① 1860년대 이항로, 기정진 등이 척화주전론을 주장했습니다. ③, ④, ⑤ 모두 위정척사 운동의 특징에 해당합니다.


5. 다음에서 설명하는 정부 기구는 무엇인가?

개항 이후 정부는 개화 정책을 총괄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였다. 이 기구 산하에는 사대사, 교린사, 군무사 등 12사를 두어 외교, 통상, 군사, 재정 등 국가의 주요 업무를 관장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 기구는 임오군란 당시 흥선대원군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하였다.

① 기기창

② 박문국

③ 통리기무아문

④ 우정총국

⑤ 규장각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개화 정책을 총괄하기 위해 1880년에 설치된 정부 기구로, 산하에 12사를 둔 것은 통리기무아문입니다. 통리기무아문은 임오군란 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되었다가 이후 다시 설치되었습니다.

오답 해설:기기창: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 ② 박문국: 신문(한성순보) 발행 기구 ④ 우정총국: 근대식 우편 업무 담당 기구 ⑤ 규장각: 정조 때 설치된 왕실 도서관 겸 학술 연구 기관


6. 다음 개혁 정강을 발표한 정치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청에 대하여 행하던 조공의 허례를 폐지한다. •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 평등의 권리를 세우고, 능력에 따라 관리를 등용한다. • 모든 재정은 호조에서 통할한다. • 혜상공국을 혁파한다.

①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아 점진적 개혁을 추구하였다.

② 일본의 군사적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③ ‘왜양일체론’을 내세우며 외세 배척을 주장하였다.

④ 구식 군인 및 도시 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다.

⑤ 서양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영남만인소를 올렸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개혁 정강은 갑신정변(1884) 당시 급진개화파가 발표한 14개조 개혁 정강의 일부입니다. 급진개화파는 김옥균, 박영효 등을 중심으로 일본의 지원을 받아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오답 해설:온건개화파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 위정척사파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임오군란의 지지 기반에 대한 설명입니다. ⑤ 1880년대 위정척사 운동에 대한 설명입니다.


7. (가) 조약이 체결되는 계기가 된 사건은?

(가) 텐진 조약 1. 청과 일본 양국은 4개월 내에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한다. 2. 이후 조선에 군대를 파병할 경우, 양국은 사전에 서로에게 문서로 통지한다.

① 운요호 사건

② 임오군란

③ 갑신정변

④ 동학농민운동

⑤ 아관파천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텐진 조약(1885)갑신정변(1884)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 군대가 조선에 출병했던 사건을 마무리하기 위해 청과 일본이 체결한 조약입니다. 이 조약은 이후 청일전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8. 다음과 같은 주장을 한 인물들이 파견되었던 사절단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청에 다녀온 영선사 일행은 서양 기술의 도입이 시급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민씨 정권의 소극적 태도와 재정 부족으로 개혁이 지지부진하자, 우리는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이 사회 제도 전반을 바꾸는 급진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① 미국 대통령에게 고종의 국서를 전달하였다.

② 황준헌의 『조선책략』을 국내에 처음 소개하였다.

③ 정부의 공식 사절단이 아닌, 비밀리에 파견되었다.

④ 이들이 귀국하여 근대식 무기 공장인 기기창을 설립하였다.

⑤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로 끝났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자료는 청의 양무운동(서양 기술 도입)의 한계를 느끼고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전면적 개혁을 주장하는 급진개화파의 입장입니다. 이들은 갑신정변을 주도했으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 만에 실패하였습니다.

오답 해설:보빙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 2차 수신사 김홍집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 조사시찰단(신사유람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영선사에 대한 설명입니다.


9. 강화도 조약 이후 체결된 부속 조약의 내용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보기>

ㄱ. 일본 화폐가 조선에서 유통될 수 있었다. ㄴ. 조선의 쌀과 잡곡이 무제한으로 유출될 수 있었다. ㄷ. 외국 상인의 활동 범위가 내륙 시장까지 허용되었다. ㄹ. 일본으로 수출되는 상품에 대해 관세를 부과하지 않았다.

① ㄱ, ㄴ

② ㄱ, ㄷ, ㄹ

③ ㄱ, ㄴ, ㄹ

④ ㄴ, ㄷ, ㄹ

⑤ ㄱ, ㄴ, ㄷ, 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강화도 조약 이후 체결된 조일수호조규 부록조일무역규칙에 따르면, 일본 화폐 유통이 허용되었고(ㄱ), 조선의 곡물이 무제한으로 유출될 수 있었으며(ㄴ), 일본 수출입 상품에 관세가 없었습니다(ㄹ).

오답 해설: ㄷ. 외국 상인의 활동 범위가 내륙 시장까지 허용된 것은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체결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의 내용입니다.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에는 일본 상인의 활동 범위가 개항장 거류지 내로 한정되었습니다.


10. 밑줄 그은 ‘이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임오군란 진압을 계기로 청은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그 결과 체결된 이 조약은 청나라 상인이 한성(서울)과 양화진에서 점포를 개설하여 영업하는 것을 허용하였으며, 이는 기존의 개항장 중심 무역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①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다.

②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③ 청과 일본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하는 계기가 되었다.

④ 명백한 치외법권을 규정하여 청 상인에게 특권을 부여했다.

⑤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미국과의 연대를 강조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밑줄 그은 ‘이 조약’은 임오군란 이후 청과 조선 사이에 체결된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1882)입니다. 이 조약은 청나라 상인의 내륙 통상권 일부와 함께, 청나라 상인이 조선에서 죄를 지었을 경우 청나라 관리가 재판하는 치외법권을 명시하고 있어 대표적인 불평등 조약으로 평가받습니다.

오답 해설: ① 조선이 서양 국가와 맺은 최초의 조약은 조미수호통상조약(1882)입니다. ② 일본에 배상금을 지불하는 내용은 제물포 조약(1882)입니다. ③ 청일 양국 군대 철수는 텐진 조약(1885)의 내용입니다. ⑤ 미국과의 연대를 강조한 것은 『조선책략』의 내용입니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