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중기 사회의 동요: 문벌 귀족과 무신의 시대

고려 건국 이후 안정기를 거치며 지배층 내부에서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을 배출한 가문들이 혼인 관계를 통해 거대한 세력 집단을 형성하며 ‘문벌 귀족’으로 성장했습니다. 이들은 고려 사회의 정점에 군림했지만, 그들 내부의 권력 다툼과 사회적 모순은 결국 고려 사회를 뒤흔드는 거대한 사건들로 이어졌습니다.

1. 문벌 귀족 사회의 성립과 특징

문벌 귀족은 고려 중기에 이르러 사회의 지배층으로 확고히 자리 잡은 세력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혈연과 학벌, 정치적 경력을 바탕으로 폐쇄적인 권력 구조를 구축했습니다.

• 권력 유지 수단:
  • 정치: 음서(蔭敍)와 과거(科擧) 독점: 문벌 귀족은 조상의 공로를 바탕으로 자손이 시험 없이 관리가 될 수 있는 음서 제도를 적극적으로 활용했습니다. 이는 그들의 지위를 세습하는 핵심적인 수단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들은 높은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과거에서도 급제자를 다수 배출하며 주요 관직을 독점했습니다.
  • 사회: 왕실과의 중첩된 혼인 관계: 유력 가문들은 서로 혼인 관계를 맺어 세력을 강화했으며, 특히 왕실과의 혼인은 권력을 장악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었습니다. 왕의 장인이 되어 외척(外戚)으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경원 이씨 가문의 이자겸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 경제: 공음전(功蔭田)과 과전(科田): 문벌 귀족은 관직 복무의 대가로 받는 과전 외에도, 5품 이상 고위 관료에게 지급되어 자손에게 세습이 가능한 공음전을 소유했습니다. 이는 이들의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이 되어 권력을 뒷받침했습니다.

2.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과 동요

견고해 보이던 문벌 귀족 사회는 내부의 권력 독점 심화와 지방 세력의 성장, 새로운 국제 정세 속에서 심각한 모순을 드러내며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 이자겸의 난 (1126): 권력의 정점에서 벌어진 반란

경원 이씨 가문의 이자겸은 예종과 인종, 두 왕에 걸쳐 자신의 딸들을 왕비로 들여보내며 외척으로서 절대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의 권세는 왕을 능가할 정도였으며, “십팔자(十八子)가 왕이 된다(十八子爲王說)”는 도참설을 내세워 왕위 찬탈까지 넘보았습니다.

• 배경: 이자겸의 과도한 권력 집중과 횡포, 그리고 신흥 강국인 금(金)나라에 대한 사대(事大) 요구 수용에 대한 정치적 반발이 있었습니다. 당시 금은 고려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는데, 이자겸은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 전개와 결과: 이자겸은 자신을 제거하려는 인종의 시도를 역으로 이용하여, 척준경과 함께 군사를 일으켜 궁궐을 불태우고 왕을 감금하는 등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나 권력을 나누는 과정에서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에 갈등이 생겼고, 결국 인종이 척준경을 포섭하여 이자겸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 의의: 이자겸의 난은 문벌 귀족 사회의 내부 모순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사건입니다. 왕권이 크게 실추되었고, 수도 개경의 궁궐이 불타는 등 중앙 통치 체제가 심각한 타격을 입었습니다.

2) 묘청의 서경 천도 운동 (1135): 지역과 사상의 대립

이자겸의 난으로 개경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자, 이를 기회로 새로운 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세력이 등장했습니다. 승려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 세력이 그 주인공이었습니다.

• 대립 구도:
  • 서경파 (묘청, 정지상 등):
    • 주장: 개경의 지덕(地德)이 쇠했으니 풍수지리상 길지인 서경으로 수도를 옮겨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사상: 풍수지리설, 자주적 전통 사상
    • 대외 정책: 칭제건원(稱帝建元, 황제를 칭하고 독자적 연호를 사용)과 금국정벌(金國征伐)을 내세우며 북진 정책 계승을 주장했습니다.
  • 개경파 (김부식 등):
    • 주장: 기존 질서 유지를 위해 서경 천도에 반대했습니다.
    • 사상: 유교적 합리주의
    • 대외 정책: 금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통해 안정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 전개와 결과: 인종은 초기에 서경 천도에 긍정적이었으나, 개경 문벌 귀족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결국 중단했습니다. 이에 묘청은 서경에서 국호를 ‘대위국(大爲國)’, 연호를 ‘천개(天開)’라 칭하며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 반란은 김부식이 이끄는 관군에 의해 1년여 만에 진압되었습니다.
• 의의: 이 사건은 문벌 귀족 사회 내부의 보수파와 개혁파, 개경 세력과 서경 세력 간의 정치적, 사상적 대립을 보여줍니다. 민족주의 사학자 신채호는 이 사건을 “조선 역사상 일천년래 제일대사건”이라 평가하며, 자주적인 서경파의 패배로 한국사가 사대주의의 길로 들어섰다고 비판했습니다.

3. 무신 정변 (1170): 차별에 대한 무력의 반격

문벌 귀족 사회의 모순은 결국 무신들의 불만 폭발로 이어졌습니다. 오랜 기간 지속된 ‘문신 우위, 무신 차별’ 정책은 무신 정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 배경:
  • 극심한 차별 대우: 무신은 문신과 달리 최고 관직에 오르기 어려웠고, 같은 품계라도 문신에 비해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심지어 젊은 문신이 나이 많은 상장군에게 모욕을 주는 일(보현원 사건)이 발생할 정도로 무신에 대한 천대가 극심했습니다.
• 경제적 불만: 군인들에게 지급되어야 할 토지인 군인전(軍人田)이 제대로 지급되지 않아 하급 군인들의 생활고가 심각했습니다.
• 왕의 실정: 의종이 문신들과 연회를 즐기며 향락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고, 무신들을 경호나 오락의 도구로 취급한 것도 무신들의 불만을 증폭시켰습니다.
• 전개: 1170년, 의종이 개경 근처 보현원(普賢院)으로 행차했을 때, 정중부, 이의방, 이고 등이 중심이 되어 정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은 왕을 호위하던 수많은 문신들을 살해하고 의종을 폐위시킨 뒤 허수아비 왕(명종)을 내세워 권력을 장악했습니다.
• 결과 및 영향:
  • 문벌 귀족 사회의 붕괴: 약 200년간 지속된 문벌 귀족 중심의 정치 체제가 막을 내렸습니다.
  • 무신 정권 시대 개막: 이후 약 100년간 무신들이 정권을 장악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정권 초기에는 이의방, 정중부, 경대승, 이의민 등으로 지배자가 자주 바뀌며 극심한 혼란이 이어졌습니다.
  • 하층민의 봉기: 중앙의 지배 질서가 무너지자, 과도한 수탈과 신분 차별에 시달리던 농민과 천민들이 전국 각지에서 봉기(예: 망이·망소이의 난, 김사미·효심의 난)를 일으키며 사회는 더욱 혼란에 빠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