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림의 대두와 붕당 정치
조선 중기는 성리학적 통치 질서가 심화되는 과정에서 새로운 정치 세력인 사림(士林)이 중앙 정계에 본격적으로 진출하며 기존의 훈구(勳舊) 세력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기입니다. 이들의 갈등은 네 차례의 사화(士禍)라는 피비린내 나는 숙청으로 이어졌으며, 사화의 시련 속에서도 결국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한 사림은 내부적으로 붕당(朋黨)을 형성하여 정치를 이끌어 갔습니다. 본 장에서는 사화의 전개 과정부터 붕당의 출현, 그리고 예송과 환국으로 점철된 붕당 정치의 변질 과정까지를 심도 있게 학습합니다.
제1절 사림 의 성장과 4대 사화
1. 훈구와 사림의 대립
- 훈구파: 세조의 계유정난(1453)과 같은 공신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세력입니다. 이들은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대지주층이었으며, 중앙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부국강병과 중앙 집권 체제를 중시했습니다.
- 사림파: 고려 말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학통을 계승한 이들로, 주로 영남과 기호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중소 지주층으로서 성리학의 왕도 정치(王道政治)와 의리, 도덕을 바탕으로 한 향촌 자치를 이상으로 삼았습니다. 성종 대에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 세력이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관직에 등용되면서 훈구파의 비리를 비판하기 시작했고, 이는 두 세력 간의 갈등을 격화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2. 4대 사화의 전개
네 차례의 사화는 사림이 훈구 세력에게 큰 타격을 입은 사건이지만, 동시에 사림이 서원(書院)과 향약(鄕約)을 통해 향촌 사회에 뿌리내리며 재기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 무오사화 (1498, 연산군 4년)
- 원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이는 항우에게 죽은 초나라 의제를 조문하는 글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 전개: 김종직의 제자인 김일손이 이를 사초(史草)에 실으려 하자, 훈구파인 유자광, 이극돈 등이 이를 연산군에게 고발하여 세조를 능멸한 대역죄로 몰았습니다.
- 결과: 김일손 등 관련 사림 세력이 대거 처형되거나 유배되었습니다. 사초 내용이 문제가 된 최초의 필화(筆禍) 사건입니다.
- 갑자사화 (1504, 연산군 10년)
- 원인: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사 사건의 전말이 알려진 것이 직접적인 계기였습니다.
- 전개: 임사홍 등이 폐비 윤씨 사건의 관련자들을 연산군에게 고발하자, 격노한 연산군이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습니다.
- 결과: 이 사건은 사림뿐만 아니라 사건에 연루된 훈구 세력까지 함께 처벌받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훈구와 사림의 대립이라기보다는 연산군의 개인적인 원한과 폭정에 의한 성격이 강했습니다.
- 기묘사화 (1519, 중종 14년)
- 배경: 연산군을 몰아낸 중종반정 이후, 중종은 훈구 공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趙光祖)를 비롯한 급진적인 사림을 등용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했습니다.
- 조광조의 개혁 정치:
- 현량과(賢良科) 실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인재를 추천으로 등용하는 제도
- 위훈삭제(僞勳削除): 중종반정 공신 중 자격 미달자의 공훈을 삭제할 것을 주장
- 소격서(昭格署) 폐지: 도교적 제사를 주관하던 관청 폐지
- 향약(鄕約)의 전국적 보급 추진
- 전개: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특히 위훈삭제는 훈구 세력의 극심한 반발을 샀습니다. 훈구 세력은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글씨를 써서 벌레가 파먹게 한’ 사건을 조작하여 조광조가 왕이 되려 한다는 모함을 했습니다.
- 결과: 중종이 이를 믿고 조광조를 비롯한 신진 사림 세력을 숙청하였습니다.
- 을사사화 (1545, 명종 즉위년)
- 원인: 인종의 외척인 대윤(大尹, 윤임) 세력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小尹, 윤원형) 세력 간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권력 다툼이 원인이었습니다.
- 전개: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에 사망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소윤 세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대윤 일파를 역모로 몰아 대대적으로 숙청했습니다.
- 결과: 이 과정에서 대윤에 동조했던 많은 사림이 화를 입었습니다. 외척 간의 권력 투쟁에 사림이 휘말린 대표적인 사화입니다.
제2절 붕당 정치의 시작과 전개
1. 붕당의 출현 (선조 대)
4대 사화에도 불구하고 사림은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세력을 회복하여 선조 대에 이르러 중앙 정계를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그러나 정국의 주도권을 잡은 사림은 학문적 입장과 정치적 견해의 차이로 분열하기 시작했습니다.
- 직접적 계기: 이조 전랑(吏曹銓郞)직 임명 문제
- 이조 전랑은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고, 삼사의 관원 선발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자리였습니다.
- 척신 정치의 잔재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 차이가 있던 중, 김효원을 이조 전랑에 추천하는 과정에서 외척인 심의겸이 반대하며 갈등이 표면화되었습니다.
- 분열:
- 동인(東人): 김효원을 지지하는 신진 사림. 이황, 조식의 학문을 계승. 척신 정치 청산에 적극적. (김효원의 집이 도성 동쪽에 위치)
- 서인(西人): 심의겸을 지지하는 기성 사림. 이이, 성혼의 학문을 계승. 척신 정치 청산에 온건적. (심의겸의 집이 도성 서쪽에 위치)
2. 예송 논쟁 (현종 대)
붕당 정치는 초기에는 상호 비판과 견제를 통해 건전하게 운영되었으나, 점차 상대 붕당을 인정하지 않고 대립이 격화되었습니다. 특히 현종 대에 발생한 예송(禮訟) 논쟁은 붕당 간의 대립이 극에 달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예송은 왕실의 상복(喪服) 착용 기간을 둘러싼 논쟁이었으나, 그 본질은 왕권과 신권의 관계 설정, 즉 왕의 특수성을 인정할 것인가(왕권 강화, 남인), 아니면 왕도 사대부와 같이 예법의 적용을 받아야 하는가(신권 강화, 서인)를 둘러싼 정통성 논쟁이었습니다.
- 제1차 예송 (기해예송, 1659): 효종 사망 시
- 쟁점: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
- 서인 (송시열 주장): 효종은 인조의 둘째 아들이므로 1년(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법 적용 주장)
- 남인 (허목 주장):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의 예우를 하여 3년(참최복)을 입어야 한다. (왕의 특수성 강조)
- 결과: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1년복으로 결정. 서인 집권.
- 제2차 예송 (갑인예송, 1674): 효종비(인선왕후) 사망 시
- 쟁점: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상복을 얼마 동안 입어야 하는가?
- 서인: 둘째 며느리이므로 9개월(대공복)을 입어야 한다.
- 남인: 장남의 아내와 동등한 예우를 하여 1년(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 결과: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어 1년복으로 결정. 남인 집권.
3. 환국 정치 (숙종 대)
숙종 대에 이르면 붕당 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어, 국왕이 특정 붕당을 일거에 몰아내고 상대 붕당에게 정권을 모두 넘겨주는 환국(換局)이 발생합니다. 이는 왕권을 강화하려는 숙종의 의도와 맞물려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 경신환국 (1680): 남인 세력이 역모를 꾀했다는 ‘유악(油幄) 사건’을 빌미로 서인이 남인을 대거 숙청하고 집권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서인이 강경파인 노론(老論, 송시열 중심)과 온건파인 소론(少論, 윤증 중심)으로 분열되었습니다.
- 기사환국 (1689): 숙종이 후궁 장씨(장희빈)의 아들을 원자(세자)로 삼으려 하자, 서인(특히 송시열)이 이를 반대했습니다. 이에 숙종이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을 등용했으며, 인현왕후를 폐위하고 장씨를 왕비로 책봉했습니다.
- 갑술환국 (1694): 숙종이 폐비 민씨(인현왕후) 복위 운동을 계기로 남인 세력을 몰아내고 서인(노론, 소론)을 다시 등용했습니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씨는 희빈으로 강등되었습니다.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 정치는 공존의 원리가 무너지고,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경향이 뚜렷해졌습니다.
사림과 붕당 정치: 주요 왕 핵심 정리
성종 대 사림의 등용부터 숙종 대 환국에 이르기까지, 조선 중기~후기 왕들의 핵심 업적과 정치적 사건들을 정리했습니다.
성종 (聖宗) :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
-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지방에서 학문을 닦던 김종직을 비롯한 사림(士林) 세력을 등용하기 시작했습니다.
- 사림 세력을 주로 삼사(三司: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언관직에 임명하여 훈구파를 비판하고 견제하는 역할을 맡겼습니다.
- (결과) 이는 훈구파와 사림파 간의 갈등이 시작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연산군 (燕山君) : 사림의 첫 번째 시련 (사화)
- 무오사화 (1498)
- (원인) 김종직이 과거 세조의 왕위 찬탈을 비판한 글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발단이 되었습니다.
- (경과)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이를 사초(史草)에 실으려 하자, 훈구파(유자광)가 이를 왕에게 고발했습니다.
- (결과) 사초 문제가 원인이 되어 사림 세력이 대거 숙청된 최초의 필화(筆禍) 사건입니다.
- 갑자사화 (1504)
- (원인) 연산군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사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이 원인이었습니다.
- (결과) 사림, 훈구 세력을 가리지 않고 사건 관련자들을 모두 숙청했습니다.
중종 (中宗) : 조광조의 개혁과 좌절
- 중종반정으로 즉위하였으며, 반정 공신인 훈구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조광조(趙光祖) 등 급진적인 사림을 등용했습니다.
- 조광조의 급진적 개혁 정치
- 현량과(賢良科): 추천을 통해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
- 위훈삭제(僞勳削除): 중종반정의 가짜 공신을 삭제하려 한 정책으로, 훈구파의 극심한 반발을 샀습니다.
- 소격서(昭格署) 폐지: 도교 행사를 주관하던 관청을 폐지 (성리학적 이념 강화).
- 향약(鄕約): 사림의 이념을 향촌에 보급하려 했습니다.
- 기묘사화 (1519)
- (원인) 조광조의 급진 개혁, 특히 ‘위훈삭제’에 대한 훈구파의 반발.
- (경과) 훈구파가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肖爲王)’ (조(趙)씨가 왕이 된다)이라는 글자를 조작해 모함했습니다.
- (결과)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이 숙청되었습니다.
명종 (明宗) : 외척 정치의 폐해
- 을사사화 (1545)
- (원인)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外戚) 간의 권력 다툼이었습니다.
- (대립) 인종의 외척 대윤(윤임) vs 명종의 외척 소윤(윤원형).
- (결과) 소윤 세력이 승리하여 대윤 세력을 숙청할 때, 여기에 휘말린 많은 사림이 희생되었습니다.
선조 (宣祖) : 붕당(朋黨) 정치의 시작
- 4대 사화에도 불구하고 서원과 향약을 기반으로 지방에서 세력을 키운 사림이 마침내 중앙 정계를 장악했습니다.
- (배경) 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 문제와 이조 전랑직 임명 문제를 계기로 사림이 분열했습니다.
- (결과) 사림이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으로 나뉘었습니다.
- 동인 (김효원): 신진 사림. 척신 청산에 적극적. (이황, 조식 학통)
- 서인 (심의겸): 기성 사림. 척신 청산에 온건적. (이이, 성혼 학통)
현종 (顯宗) : 예법(禮法)으로 충돌하다 (예송 논쟁)
- 왕실의 상복 착용 기간을 둘러싼 붕당 간의 논쟁으로, 본질은 왕권과 신권의 대립이었습니다.
- 제1차 예송 (기해예송, 1659): 효종 사망
- (서인) 1년복 주장 (효종을 둘째 아들로 취급) → 승리 (서인 집권)
- (남인) 3년복 주장 (효종을 왕(장남)으로 대우)
- 제2차 예송 (갑인예송, 1674): 효종비 사망
- (서인) 9개월복 주장 (둘째 며느리 대우)
- (남인) 1년복 주장 (장남 며느리 대우) → 승리 (남인 집권)
숙종 (肅宗) : 붕당 정치의 변질 (환국)
- 환국(換局): 왕이 직접 개입하여 집권 붕당을 급격히 교체하는 정치 행태. 붕당 간의 공존이 무너지고 일당 전제화가 시작되었습니다.
- 경신환국 (1680):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이 집권했습니다.
- (결과) 이 과정에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다시 분열했습니다.
- 기사환국 (1689): 서인을 몰아내고 남인이 집권했습니다.
- (배경) 장희빈의 아들(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에 서인이 반대.
- (결과)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이 왕비가 됨.
- 갑술환국 (1694): 남인을 몰아내고 서인(노론/소론)이 재집권했습니다.
- (결과)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장희빈은 강등되었습니다.
[예제 문제 및 정답과해설]
1. 다음 사화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김종직의 제자 김일손이 스승이 지은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이를 빌미로 유자광 등 훈구 세력은 김일손을 비롯한 사림들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① 왕의 생모인 폐비 윤씨 사건이 빌미가 되어 일어났다.
② 조광조 등 신진 사림의 급진적 개혁이 원인이었다.
③ 외척 세력인 대윤과 소윤의 갈등으로 인해 발생하였다.
④ 세조의 왕위 찬탈을 우회적으로 비판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⑤ 사초(史草)의 내용을 문제 삼았다는 점에서 무오사화라고 불린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사료는 김종직의 ‘조의제문’과 사초 문제를 언급하고 있으므로 무오사화(1498)에 해당한다. ‘조의제문’은 초나라 의제를 조문하는 형식을 빌려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를 비판한 글이다. 따라서 ④가 정답이다.
오답 풀이: ①은 갑자사화, ②는 기묘사화, ③은 을사사화에 대한 설명이다. ⑤는 ‘무오사화’라는 명칭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으나, ④가 사화의 핵심적인 발단과 성격을 가장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사료의 핵심 내용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은 ④이다.
2. (가) 인물의 개혁 정치 내용으로 옳지 않은 것은?
중종은 공신 세력을 견제하고자 (가) 를/을 등용하여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는 도교 행사를 주관하던 소격서를 폐지하고, 현량과를 통해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의 개혁은 훈구파의 거센 반발을 샀고, 결국 ‘주초위왕’이라는 모함을 받아 사사되었다.
① 위훈삭제를 주장하였다.
② 향약의 전국적 보급을 시도하였다.
③ 경연을 강화하여 왕도 정치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④ 자신의 후임자를 추천할 수 있는 이조 전랑직을 요구하였다.
⑤ 유교 윤리를 보급하기 위해 『소학』의 교육을 강조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내용은 소격서 폐지, 현량과, ‘주초위왕’ 등의 키워드를 통해 조광조임을 알 수 있다. 조광조는 위훈삭제(①), 향약 보급(②), 경연 강화와 소학 보급(③, ⑤) 등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다. 그러나 ④의 이조 전랑직 임명 문제는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분열되는 붕당 정치의 시작점(선조 대)과 관련된 내용으로, 조광조의 개혁(중종 대)과는 시기적으로 관련이 없다.
3. 다음 사건들이 일어난 순서대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김효원과 심의겸의 대립으로 사림이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었다. (나) 효종의 정통성을 둘러싸고 서인과 남인이 상복 문제로 대립하였다. (다) 조광조가 위훈삭제를 주장하다가 훈구파의 반발로 제거되었다. (라)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희빈의 아들이 세자로 책봉되자 남인이 집권하였다.
① (다) – (가) – (나) – (라)
② (다) – (나) – (가) – (라)
③ (가) – (다) – (라) – (나)
④ (가) – (나) – (다) – (라)
⑤ (나) – (다) – (가) – (라)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①
해설: 각 사건의 시기를 파악하는 문제이다. (다) 기묘사화 (중종, 1519) (가) 붕당의 출현 (선조, 1575년 경) (나) 예송 논쟁 (현종, 1659년 기해예송 시작) (라) 기사환국 (숙종, 1689) 따라서 시기 순서는 (다) → (가) → (나) → (라) 이다.
4. 밑줄 그은 ‘이 논쟁’에 대한 탐구 활동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현종 대에 발생한 이 논쟁은 왕실의 의례를 둘러싼 학문적 토론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서인과 남인 간의 치열한 정치 투쟁이었다. 첫 번째 논쟁에서는 효종을 차남으로 본 서인이 승리하였고, 두 번째 논쟁에서는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강조한 남인이 승리하여 정국의 주도권을 잡았다.
① 붕당이 발생하게 된 원인을 찾아본다.
② 대윤과 소윤 세력의 권력 다툼을 조사한다.
③ 왕위 계승의 정통성과 신하의 예법 적용 범위를 분석한다.
④ 숙종이 왕권 강화를 위해 정국을 급격히 전환시킨 사례를 찾아본다.
⑤ 정여립 모반 사건이 정국에 미친 영향을 알아본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밑줄 그은 ‘이 논쟁’은 예송 논쟁이다. 예송 논쟁의 핵심은 효종이 비록 차남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의 예우를 해야 하는가(남인), 아니면 차남이므로 일반 사대부의 예법에 따라야 하는가(서인)의 문제였다. 이는 곧 왕의 특수성과 정통성, 그리고 왕에게 적용되는 예법의 범위에 대한 논쟁이었다. 따라서 ③이 가장 적절한 탐구 활동이다.
오답 풀이: ①은 이조 전랑직 문제, ②는 을사사화, ④는 환국, ⑤는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열되는 계기가 된 사건에 대한 설명이다.
5. 다음은 특정 사화에 대한 설명이다. ㉠~㉣ 중 사실과 다른 것은?
㉠중종반정 이후 정계에 진출한 사림은 ㉡조광조를 중심으로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은 훈구 세력의 반발을 샀고, 훈구파는 ㉢‘주초위왕’ 사건을 조작하여 사림을 모함하였다. 결국 중종은 이들을 숙청하였는데,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① ㉠
② ㉡
③ ㉢
④ ㉣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내용은 조광조의 개혁과 ‘주초위왕’ 사건을 다루고 있으므로 기묘사화(1519)에 대한 설명이다. 따라서 ㉣을사사화(1545)는 잘못된 설명이다. 을사사화는 명종 즉위년 외척인 대윤과 소윤의 갈등으로 발생했다.
6. (가)와 (나) 붕당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사림은 이조 전랑직 임명을 둘러싸고 대립하다가, 신진 사림 중심의 (가)과/와 기성 사림 중심의 (나)(으)로 분열되었다. 이후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계기로 (가)은/는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나뉘었다.
<보기>
ㄱ. (가) – 김효원을 지지하였으며, 주로 이황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ㄴ. (가) – 척신 정치의 청산에 대해 온건적인 입장을 취했다. ㄷ. (나) – 심의겸을 지지하였으며, 숙종 대에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ㄹ. (나) – 광해군 대에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가)는 동인, (나)는 서인이다. ㄱ. 동인(가)은 신진 사림으로 김효원을 지지했고, 이황과 조식의 학통을 계승하였다. (옳은 설명) ㄴ. 동인(가)은 척신 정치 청산에 적극적이었고, 온건적인 입장은 서인(나)이었다. (틀린 설명) ㄷ. 서인(나)은 기성 사림으로 심의겸을 지지했으며, 경신환국 이후 남인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놓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화되었다. (옳은 설명) ㄹ. 광해군 대에 정국을 주도한 것은 동인에서 갈라져 나온 북인이었다. (틀린 설명) 따라서 옳은 설명은 ㄱ과 ㄷ이다.
7. 다음 가상 대화가 나타난 시기의 정국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신하 1: 전하, 장씨 소생의 원자를 세자로 책봉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이옵니다. 중전마마께서 아직 젊으시니 조금 더 기다리심이 옳습니다.
국왕: 과인의 결정을 신하들이 이렇듯 반대하니, 이는 과인을 능멸하는 처사다! 이들을 모두 파직하고 위리안치하라!
신하 2: 전하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이제 저희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게 되었으니, 전하의 뜻을 받들어 국정을 쇄신하겠나이다.
① 서인이 기해예송에서 승리하여 정국을 주도하였다.
②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③ 유악 사건을 빌미로 서인이 남인을 축출하였다.
④ 소론의 지지를 받은 경종이 즉위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대화는 숙종이 장희빈의 아들을 세자로 책봉하는 문제(원자 정호)로 서인과 대립하고, 이들을 몰아내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이는 기사환국(1689)에 해당한다. 이 사건으로 송시열 등 서인 세력이 실각하고 인현왕후가 폐위되었으며, 남인이 재집권하였다.
오답 풀이: ①은 현종 대, ③은 경신환국(1680), ④는 숙종 이후의 상황이다.
8. 사림 세력이 연이은 사화 속에서도 세력을 유지하고 재기할 수 있었던 기반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① 막대한 공신전을 바탕으로 한 경제력
② 중앙의 핵심 관직인 의정부와 6조 장악
③ 향촌 사회의 서원과 향약을 통한 인재 양성
④ 왕실 외척 세력과의 긴밀한 혼인 관계
⑤ 군사적 실권 장악을 통한 독자적 세력 유지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사림은 4대 사화를 거치며 중앙 정계에서 큰 타격을 입었지만, 그들의 기반은 지방의 향촌 사회였다. 이들은 향촌에 서원을 세워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양성했으며, 향약을 보급하여 향촌 사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를 통해 꾸준히 인재를 배출하고 세력을 유지하여 결국 중앙 정계를 장악할 수 있었다.
오답 풀이: ①, ②, ④는 주로 훈구 세력의 특징이며, ⑤는 조선 시대 신하가 갖기 어려운 기반이었다.
9. 다음 두 사건의 공통점으로 가장 옳은 것은?
(가) 연산군은 자신의 생모인 폐비 윤씨의 사사 사건과 관련된 자들을 사림과 훈구를 가리지 않고 대대적으로 숙청하였다.
(나) 명종이 즉위하자 외척인 윤원형의 소윤 세력은 인종의 외척이었던 윤임의 대윤 세력과 그들을 따르던 사림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였다.
① 사초에 실린 글이 문제가 되어 발생하였다.
② 급진적인 개혁 정책에 대한 반발로 일어났다.
③ 붕당 간의 예법 논쟁이 정치 투쟁으로 번졌다.
④ 사림과 훈구의 이념 대립보다 다른 요인이 크게 작용했다.
⑤ 이조 전랑직의 임명을 둘러싼 갈등이 원인이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가)는 갑자사화, (나)는 을사사화이다. 갑자사화는 연산군의 개인적 원한이, 을사사화는 외척 간의 권력 투쟁이 핵심 원인이었다. 두 사건 모두 사림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무오사화나 기묘사화처럼 사림과 훈구의 이념 및 정치적 대립이 주된 원인이기보다는, 각각 왕의 폭정과 외척 간의 다툼이라는 다른 요인이 더 크게 작용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오답 풀이: ①은 무오사화, ②는 기묘사화, ③은 예송 논쟁, ⑤는 붕당의 출현 배경이다.
10. 밑줄 그은 ‘환국’이 거듭되면서 나타난 정치적 변화로 가장 적절한 것은?
숙종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특정 붕당을 지지하다가도 정세가 바뀌면 그들을 일시에 몰아내고 상대 붕당에 정권을 넘기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처럼 정권이 급격하게 교체되는 환국은 경신환국, 기사환국, 갑술환국 등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① 왕권이 약화되고 신권 중심의 정치가 이루어졌다.
② 붕당 간의 상호 비판과 공존의 원리가 강화되었다.
③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심화되었다.
④ 탕평책이 실시되어 붕당 간의 대립이 완화되었다.
⑤ 삼사를 중심으로 한 언론 기능이 활성화되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환국은 한 붕당이 다른 붕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정권을 독점하는 방식으로, 승리한 붕당이 패배한 붕당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과 숙청을 가했다. 이로 인해 붕당 간의 공존과 견제라는 긍정적 기능은 사라지고, 오직 권력 쟁취를 위한 극단적인 대립만 남게 되었다. 이는 특정 붕당이 권력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一黨 專制化) 경향을 심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오답 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