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 시대의 성립과 발전
1. 고구려의 중앙 집권과 전성기 (4~5세기): 동아시아의 패자
고구려는 강력한 철기 기술과 기마병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을 다진 후, 4세기 후반부터 5세기에 걸쳐 동아시아의 강자로 군림하며 최전성기를 맞이했습니다.1) 중앙 집권 체제의 확립: 소수림왕 (371~384)
고구려의 위기 상황에서 즉위하여 국가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전성기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율령 반포: 국가 통치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율령(律令)을 반포했습니다.
- 불교 수용: 전진(前秦)으로부터 불교를 수용(372년)하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사상을 통합했습니다.
- 태학 설립: 인재 양성과 유교 교육을 위해 수도에 교육 기관인 태학(太學)을 설립했습니다.
2) 광개토대왕 (391~412) – 영토 확장
고구려의 영토를 비약적으로 넓히고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장악했습니다.- 독자적 연호: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중국과 대등한 국가임을 과시했습니다.
- 북방 정복: 후연을 격파하여 요동 지역을 완전히 장악했습니다.
- 신라 구원(400년): 왜구가 신라에 침입하자 5만 군대를 보내 격퇴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금관가야의 세력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 유물: 그의 업적은 아들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장수왕 (413~491) – 남하 정책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고 적극적인 남진 정책을 펼쳤습니다.- 평양 천도(427년):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남하 정책의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 한강 유역 장악: 백제의 수도 한성(서울)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전사시켰습니다(475년). 이로써 고구려는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최전성기를 맞이합니다.
- 나제 동맹: 고구려의 남하에 위협을 느낀 신라와 백제는 나제 동맹(433년)을 체결하여 대항했습니다.
- 유물: 한반도 중부까지 영역을 확장했음을 보여주는 충주 고구려비(중원 고구려비)를 건립했습니다.
💡 핵심 요약: 고구려의 전성기 흐름
- 소수림왕: 기틀 마련 (불교, 태학, 율령)
- 광개토대왕: 영토 확장 (만주, 요동, 영락 연호)
- 장수왕: 남하 정책 (평양 천도, 한강 장악, 충주 고구려비)
2. 백제의 전성기 (4세기)와 중흥 노력: 해상 강국의 위용
백제는 한강 유역의 풍부한 생산력을 기반으로 삼국 중 가장 먼저 전성기를 맞이했으며, 고구려의 침략으로 쇠퇴한 후에도 중흥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1) 전성기 구가: 근초고왕 (346~375)
근초고왕은 백제의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하고, 가장 넓은 영토와 강력한 국제적 위상을 확보했습니다.
- 최대 영토 확보: 남쪽으로는 마한의 잔여 세력을 모두 병합하고, 북쪽으로는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켰습니다.
- 해외 교류: 중국의 동진, 일본의 왜와 교류하며 해상 교역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 칠지도(七支刀): 왜왕에게 하사한 칼로, 당시 백제의 높은 제철 기술과 국제적 위상을 보여줍니다.
- 역사서 편찬: 박사 고흥에게 역사서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의 정통성을 기록했습니다.
2) 웅진 시대의 부흥: 무령왕 (501~523)
고구려 장수왕에게 한성을 빼앗기고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혼란을 수습하고 국력을 회복시켰습니다.
- 지방 통제 강화: 지방의 22개 중요 지역에 22담로를 설치하고 왕족을 파견하여 통제력을 강화했습니다.
- 대외 관계: 중국 남조의 양(梁)나라와 활발히 교류하며 선진 문물을 수용했습니다.
- 무령왕릉: 중국 남조의 영향을 받은 벽돌무덤 양식으로, 도굴되지 않은 채 발견되어 피장자를 정확히 알 수 있습니다.
3) 사비 천도와 중흥 노력: 성왕 (523~554)
성왕은 백제의 재도약을 위해 수도를 옮기고 제도를 정비하며 중흥을 시도했습니다.
- 천도 및 국호: 수도를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538년), 국호를 ‘남부여’로 변경하여 부여 계승 의식을 천명했습니다.
- 체제 정비: 중앙 관청을 22부, 지방을 5부 5방으로 정비하여 중앙 집권력을 강화했습니다.
- 불교 전파: 일본에 불교와 문화를 전파하여 아스카 문화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 한강 회복과 좌절: 신라 진흥왕과 연합하여 한강 하류를 일시 회복했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했습니다.
💡 핵심 요약: 백제의 수도 변천사
- 한성(서울) 시대: 전성기 (근초고왕) →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함락
- 웅진(공주) 시대: 문주왕 천도 → 무령왕(22담로)의 중흥 노력
- 사비(부여) 시대: 성왕 천도(남부여) → 멸망(의자왕)
3. 신라의 전성기 (6세기): 한강의 새로운 주인
신라는 국가 발전이 다소 늦었으나, 6세기 들어 지증왕, 법흥왕, 진흥왕 3대에 걸쳐 급격하게 성장하며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을 완성하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습니다.
1) 국가 체제의 정비: 지증왕 (500~514)
지증왕은 국호와 왕호를 확정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의 전환을 공식화했습니다.
- 국호 및 왕호: 기존의 ‘사로’ 대신 ‘신라(新羅)’라는 국호를, 마립간 대신 ‘왕(王)’이라는 칭호를 처음 사용했습니다.
- 제도 정비: 전국을 주, 군, 현으로 나누고, 수도에 시장 감독 관청인 동시전을 설치했습니다.
- 사회/경제: 노동력 보존을 위해 순장을 금지하고, 밭갈이에 소를 이용하는 우경(牛耕)을 장려하여 생산력을 높였습니다.
- 영토 확장: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했습니다.
2) 중앙 집권 체제 완성: 법흥왕 (514~540)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왕권 강화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 체제 정비: 율령 반포, 관리의 등급에 따른 공복 제정, 귀족 회의 수장인 상대등 설치 등이 이루어졌습니다.
- 불교 공인: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527년)하여 사상적 통합을 꾀했습니다.
- 영토 확장: 금관가야를 정복(532년)하여 낙동강 하류로 진출했습니다.
- 독자 연호: ‘건원(建元)’이라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3) 최대 영토 확보: 진흥왕 (540~576)
진흥왕은 활발한 정복 전쟁으로 한강 유역을 차지하고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 한강 유역 장악: 백제 성왕과 연합하여 한강 상류를 차지한 뒤, 동맹을 깨고 한강 하류까지 독차지했습니다. (나제 동맹 결렬 → 관산성 전투 승리)
- 대가야 정복: 대가야를 정복(562년)하여 가야 연맹을 완전히 흡수했습니다.
- 순수비 건립: 영토 확장을 기념하여 4개의 순수비(북한산비, 창녕비 등)와 단양 적성비를 세웠습니다.
- 기타 업적: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고, 거칠부에게 역사서 『국사』를 편찬하게 했습니다.
💡 핵심 요약: 신라의 3대 왕 (업적 비교)
- 지증왕: 신라/왕 칭호, 우산국, 우경, 동시전
- 법흥왕: 율령, 불교 공인(이차돈), 금관가야 정복, 건원
- 진흥왕: 한강 장악, 대가야 정복, 순수비, 화랑도
4. 가야 연맹의 발전과 멸망
가야는 변한 지역에서 성장한 여러 소국들의 연맹체입니다.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하지는 못했지만, 풍부한 철 생산과 중계 무역을 통해 독자적인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1) 전기 가야 연맹 (3~4세기)
낙동강 하류의 김해 지역을 중심으로 연맹이 형성되었습니다.
- 중심 세력: 김해의 금관가야 (시조: 수로왕)
- 경제: 철이 풍부하여 화폐처럼 사용했으며, 낙랑과 왜(일본)를 잇는 중계 무역으로 번성했습니다.
- 쇠퇴 원인: 400년, 신라를 구원하러 온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화되었습니다.
2) 후기 가야 연맹 (5~6세기)
[Image of Gayageum musical instrument]금관가야가 쇠퇴한 후, 내륙 지방인 고령 지역으로 중심지가 이동했습니다.
- 중심 세력: 고령의 대가야
- 발전: 내륙의 농업과 제철 기술을 바탕으로 성장했으나, 백제와 신라의 압박으로 세력 확장에 한계가 있었습니다.
- 문화: 우륵이 가야금을 제작하고 음악을 정리했습니다.
- 멸망:
- 금관가야: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병합
- 대가야: 562년, 신라 진흥왕에게 병합 (가야 멸망)
💡 핵심 요약: 가야 연맹의 변천
- 전기(금관가야): 김해 중심, 해상 교역(철), 고구려 공격으로 쇠퇴
- 후기(대가야): 고령 중심, 내륙 농경, 신라 진흥왕에 의해 멸망
- 한계: 각 소국이 독자적 권력을 유지하여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지 못함
🔥 삼국시대 핵심 암기 실전 문제 (추가중)
1. 다음 자료에 나타난 국가의 상황으로 옳은 것은?
장수왕이 군사 3만 명을 이끌고 와서 왕도인 한성을 포위하였다. 왕이 성문을 닫고서 나가 싸우지 못하였다. (중략) 고구려 군사가 추격하여 왕을 해쳤다. 이로써 한성 시대가 끝나고 웅진 시대가 시작되었다.
① 지방 통제를 위해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다.
②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③ 동진으로부터 승려 마라난타를 통해 불교를 수용하였다.
④ 신라의 진흥왕과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하류를 수복하였다.
⑤ 박사 고흥을 시켜 역사서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정답: ①
해설: 제시된 사료는 고구려 장수왕이 백제의 수도 **한성(위례성)**을 함락하고 **개로왕을 전사시킨 사건(475년)**을 보여줍니다. 이후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천도합니다.
웅진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한 왕은 무령왕입니다. 무령왕은 지방 통제력을 높이기 위해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였습니다.
오답 해설:
②, ⑤는 4세기 백제의 근초고왕의 업적입니다.
③은 침류왕의 업적입니다.
④는 6세기 백제의 성왕의 업적입니다.
2. 다음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주요 업적: • 국호 및 왕의 칭호를 **‘신라’와 ‘왕’**으로 정하였다. • 이사부에게 명하여 우산국을 복속하였다. • 시장을 감독하는 동시전을 설치하였다.
① 율령을 반포하고 공복 제도를 마련하였다.
② 거칠부에게 명하여 **『국사』**를 편찬하게 하였다.
③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를 공인하였다.
④ 마립간이라는 왕의 칭호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다.
⑤ 농경을 장려하고 **우경(牛耕)**을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업적은 모두 신라의 지증왕에 대한 설명입니다. 지증왕은 순장 금지, 국호 ‘신라’ 및 왕호 ‘왕’ 사용 외에도 **소를 이용한 농경(우경)**을 시작하고 농사를 권장했습니다.
오답 해설:
①, ③은 법흥왕의 업적입니다.
②는 진흥왕의 업적입니다.
④는 내물 마립간 때의 사실입니다.
3. 다음 비석을 건립한 왕의 업적에 해당하는 것은?
문화유산 사진: 충주에 위치한 중원 고구려비 비석 내용: 고구려의 관리가 신라 왕을 ‘동이 매금(東夷 買金)’이라 칭하며 양국이 동맹을 맺고 교류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음.
① 독자적 연호인 **’영락’**을 사용하여 만주를 정벌하였다.
②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겨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③ 율령을 반포하고 태학을 설립하여 중앙 집권 체제의 기틀을 다졌다.
④ 살수에서 수(隋)의 군대를 물리쳐 대승을 거두었다.
⑤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전사시켰다.
정답: ②, ⑤ (문제의 왕은 장수왕이며, ②와 ⑤는 모두 장수왕의 업적입니다. 출제 의도는 ⑤에 있을 가능성이 크나, ②도 명백한 장수왕의 업적입니다.)
해설: 중원 고구려비는 고구려 장수왕이 남한강 유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음을 보여줍니다. 장수왕은 **평양 천도(427년)**를 통해 남진 정책을 본격화하였고, 475년에는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시키고 개로왕을 전사시키는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오답 해설:
①은 광개토대왕의 업적입니다.
③은 소수림왕의 업적입니다.
④는 영양왕 때 을지문덕의 활약입니다.
4. (가) 연맹과 관련된 사실로 옳지 않은 것은?
유적지 소개: 김해 대성동 고분군, 고령 지산동 고분군 등의 유적에서는 다수의 철제 유물 (덩이쇠, 판갑옷)이 발견되었다. 이 유물들은 (가) 연맹이 활발한 중계 무역을 통해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① 철을 생산하여 낙랑과 왜 등에 수출하였다.
② 법흥왕 때 금관가야가 멸망하며 전기 연맹이 해체되었다.
③ 진흥왕 때 대가야가 멸망하며 연맹이 완전히 해체되었다.
④ 광개토대왕의 침략으로 전기 연맹이 큰 타격을 받았다.
⑤ 신지, 읍차라 불린 지배자가 있었고 소도가 존재하였다.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유적과 설명은 가야 연맹에 대한 것입니다.
⑤ 신지, 읍차는 삼한의 지배자 명칭이며, 소도는 삼한의 신성 지역입니다. 가야는 왕을 칭했습니다.
오답 해설:
①, ④는 전기 가야(금관가야)의 특징이며, ②는 금관가야 멸망(532년) 사실, ③은 대가야 멸망(562년) 사실입니다. 모두 가야에 대한 옳은 설명입니다.
5. 다음 업적을 남긴 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남부여로 고쳤다.
•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 개편하였다.
• 신라와 연합하여 한강 유역을 되찾았으나, 신라의 배신으로 관산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①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지방 통제를 강화하였다.
② 박사 고흥에게 『서기』를 편찬하게 하였다.
③ 일본에 불교를 전파하고 아스카 문화 발전에 기여하였다.
④ 웅진으로 천도한 직후의 혼란을 수습하였다.
⑤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백제 26대 **성왕(聖王)**의 업적입니다. 성왕은 수도를 사비로 옮기고, 중앙 관제를 정비하며 백제의 중흥을 이끌었습니다. 그는 일본에 불교 경전과 불상을 전파하여 일본의 아스카 문화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오답 해설:
①은 무령왕의 업적입니다.
②, ⑤는 근초고왕의 업적입니다.
④는 문주왕(천도)과 동성왕/무령왕(혼란 수습) 시기의 상황입니다.
6. 다음 제도를 시행한 고구려의 왕으로 옳은 것은?
자료: 재상 을파소의 건의를 받아들여, 춘궁기(봄)에 백성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추수기(가을)에 갚게 하는 구휼 제도를 시행하였다.
① 영양왕 ② 광개토대왕 ③ 고국천왕 ④ 소수림왕 ⑤ 장수왕
해설: 제시된 자료는 고구려의 대표적인 빈민 구휼 제도인 **진대법(Zindaebub)**에 대한 설명입니다. 진대법은 재상 을파소의 건의를 받아들여 고국천왕 때 처음 시행되었습니다.
오답 해설:
고국천왕은 진대법 외에도 왕위의 부자 상속제를 확립하고, 행정적 성격의 5부를 개편한 왕입니다.
7. 다음 문화유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사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
• 현존하는 석탑 중 가장 크고 오래된 탑이다.
• 목탑의 양식을 석재로 구현하려 한 모습이 보인다.
① 몽골의 침입으로 소실되었다.
② 돌을 벽돌 모양으로 깎아 만든 모전석탑이다.
③ 통일 신라 시대의 대표적인 2탑 1금당 양식의 탑이다.
④ 탑의 해체 과정에서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⑤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보여준다.
해설: 제시된 자료는 백제 익산 미륵사지 석탑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 탑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最古) 석탑이며, 목조 건물의 구조를 돌로 그대로 재현하려 한 특징이 있어 목탑에서 석탑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모습을 잘 보여줍니다.
오답 해설:
①은 신라 황룡사 9층 목탑입니다.
②는 신라 분황사 모전석탑입니다.
③은 통일 신라 불국사 양식입니다.
④는 **불국사 3층 석탑(석가탑)**입니다.
8. 신라 왕의 업적을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마립간’**이라는 왕호를 처음 사용하고, 고구려의 도움으로 왜를 격퇴하였다. (나)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체제를 강화하였다. (다) ‘왕’ 칭호를 처음 사용하고, 우산국을 복속하였다. (라) 화랑도를 국가 조직으로 개편하고 한강 유역을 차지하여 전성기를 열었다.
① (가) → (다) → (나) → (라)
② (가) → (나) → (다) → (라)
③ (다) → (가) → (나) → (라)
④ (라) → (가) → (다) → (나)
⑤ (나) → (가) → (라) → (다)
해설: 각 보기는 신라의 왕을 나타냅니다.
(가) 내물 마립간 (4세기 후반)
(다) 지증왕 (6세기 초, 503년)
(나) 법흥왕 (6세기 초, 527년 불교 공인)
(라) 진흥왕 (6세기 중반)
올바른 순서: (가) → (다) → (나) → (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