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대외 관계와 양난의 극복(사대교린, 임진왜란, 병자호란)
조선은 건국 초부터 안정적인 국제 질서 속에서 국가의 안위와 번영을 꾀하고자 실리적인 대외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명(明)에 대해서는 사대(事大), 일본이나 여진 등 주변 민족에 대해서는 교린(交隣)을 기본 원칙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16세기 말과 17세기 초, 동아시아 정세가 급변하며 일본과 후금(청)의 침략을 겪는 양난(兩亂)을 겪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조선은 큰 피해를 입었으나, 이를 극복하며 새로운 국제 질서에 적응해 나갔습니다.
1. 조선 전기의 대외 관계: 사대교린(事大交隣)
조선의 대외 정책의 근간은 사대교린으로, 이는 강대국과의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주변국과는 평화와 경계를 명확히 하려는 현실적인 외교 노선이었습니다.
1) 사대(事大): 명(明)과의 관계
건국 초, 명은 조선의 건국을 즉각 승인하지 않고 요동 정벌 문제, 이성계의 출신 문제 등으로 갈등을 빚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태종 대에 이르러 양국 관계는 안정기에 접어듭니다.
- 관계의 본질: 조선은 명을 상국으로 섬기는 사대 관계를 맺었습니다. 이는 단순히 굴종적인 관계가 아니라, 정기적인 사신 파견과 조공을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국왕의 정통성을 인정받으며, 동아시아의 안정적인 국제 질서에 편입되고자 하는 실리 외교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 교류 형태:
- 조공(朝貢)과 회사(回賜): 조선은 정기적, 비정기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여 토산물 등을 조공으로 바쳤고, 명은 그에 대한 답례품(회사품)을 보내왔습니다. 이는 공식적인 무역의 형태를 띠었으며, 이를 통해 왕실과 국가는 필요한 물품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 문화 교류: 사신 왕래를 통해 명의 발전된 성리학, 천문, 역법, 의학, 기술 등이 조선에 전파되었습니다.
2) 교린(交隣): 여진, 일본과의 관계
교린 정책은 ‘이웃과 사이좋게 지낸다’는 뜻으로, 기본적으로 평화를 추구하되 국경을 침범할 경우 강력하게 응징하는 회유책(懷柔策)과 강경책(强硬策)을 병행하는 것이 특징이었습니다.
- 여진(女眞)에 대한 정책:
- 강경책 (토벌): 국경을 넘어와 약탈을 일삼는 여진족에 대해서는 군대를 동원하여 토벌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세종 때 최윤덕과 김종서를 파견하여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개척하여 오늘날의 국경선을 확보했습니다.
- 회유책 (포섭): 귀순하는 여진인에게는 관직이나 토지를 주어 정착을 유도했으며, 국경 지역에 무역소(貿易所)를 설치하여 식량, 의복 등 생필품을 교역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 일본(日本)에 대한 정책:
- 강경책 (토벌): 왜구의 약탈이 심해지자 세종 때 이종무를 시켜 왜구의 근거지인 쓰시마섬(대마도)을 정벌했습니다(1419).
- 회유책 (통제된 교역): 쓰시마 정벌 이후, 일본 막부와 쓰시마 도주의 계속된 교역 요청을 받아들여 부산포, 염포(울산), 제포(창원) 3개의 항구를 개방(삼포 개항, 1426)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역을 허락했습니다. 또한 계해약조(1443)를 체결하여 연간 교역선과 교역량을 정해 통제를 강화했습니다.
2. 임진왜란(1592~1598)의 전개와 극복
16세기 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내며 조선에 명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정명가도, 征明假道)고 요구했으나 조선은 이를 거절했습니다. 결국 1592년, 일본은 약 20만 대군으로 조선을 침략하며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 전쟁 초기: 준비가 부족했던 조선군은 부산진과 동래성에서 패배하고, 충주 탄금대에서 신립이 이끄는 관군마저 격파당했습니다. 국왕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의주까지 피란을 갔습니다.
- 전세의 반전:
- 수군(水軍)의 활약: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옥포 해전에서 첫 승리를 거둔 이후, 사천 해전(거북선 첫 출전), 당포 해전 등에서 연전연승했습니다. 특히 한산도 대첩(1592)에서는 학익진(鶴翼陣) 전술을 구사하여 일본 수군 주력 부대를 격파함으로써 남해의 제해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수륙 병진 작전을 좌절시키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를 지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 의병(義兵)의 항쟁: 전직 관료, 유생, 농민 등 각계각층의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군대를 조직하여 일본군에 맞서 싸웠습니다. 곽재우, 고경명, 조헌, 정문부 등이 이끄는 의병들은 익숙한 지리를 활용한 게릴라 전술로 일본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며 관군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 관군(官軍)의 반격: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민관이 힘을 합쳐 일본의 대군을 격퇴하는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행주대첩, 1593). 김시민의 진주대첩 또한 중요한 승리였습니다.
- 정유재란(1597)과 종전: 명나라 군대의 참전 이후 지지부진한 강화 회담이 결렬되자 일본은 다시 침략해왔습니다(정유재란). 이순신이 모함으로 파직된 후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했으나,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 이순신은 명량 해전(1597)에서 13척의 배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격파하는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이순신은 노량 해전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상대로 싸우다 전사했습니다.
3.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전쟁의 피해를 복구하고 민생을 안정시켜야 했던 광해군은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 속에서 실리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습니다. 당시 명은 임진왜란 참전의 후유증으로 쇠퇴하고 있었고, 만주에서는 누르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고 후금(後金)을 건국하여 세력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 중립 외교의 배경: 명과 후금 사이에서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명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의 나라였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후금을 자극하는 것은 조선의 안위에 큰 위협이 될 수 있었습니다.
- 전개: 명이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자, 광해군은 거절할 수 없어 강홍립을 도원수로 파견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강홍립에게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밀지를 내려, 전투 상황이 불리해지자 후금에 항복하도록 했습니다(사르후 전투, 1619). 이를 통해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는 명분을 살리면서도 후금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했습니다.
- 결과: 광해군의 이러한 실리적인 중립 외교는 서인(西人) 세력으로부터 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린 ‘배신’ 행위로 비판받았고, 폐모살제(廢母殺弟)와 함께 인조반정(1623)의 주요 명분이 되었습니다.
4. 병자호란(1636)과 북벌 운동
- 병자호란의 원인: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 정권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정책을 폐기하고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내세웠습니다. 이는 후금을 크게 자극했습니다. 결국 후금은 1627년 조선을 침략하여 형제의 맹약을 맺게 했고(정묘호란), 이후 국호를 청(淸)으로 바꾸고 군신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조선이 이를 거부하자 1636년 청 태종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침략해왔습니다(병자호란).
- 전개와 결과: 왕이었던 인조는 강화도로 피하지 못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항전했으나, 45일 만에 식량이 떨어지고 지원군마저 패배하자 결국 항복을 결정했습니다. 인조는 한강의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굴욕적인 항복 의식(삼전도의 굴욕)을 행해야 했습니다. 이로써 조선은 청과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비롯한 많은 백성들이 인질로 끌려갔습니다.
- 북벌(北伐) 운동: 병자호란의 치욕을 씻고, 멸망한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청을 정벌하자는 주장이 제기되었습니다. 특히 청에 인질로 끌려갔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효종은 송시열, 이완 등과 함께 적극적으로 북벌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습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강화된 조선의 조총 부대는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나선, 羅禪) 세력을 정벌하는 데 두 차례 동원되기도 했습니다(나선정벌). 효종의 북벌 운동은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실행에 옮겨지지 못하고 중단되었으며, 이후 청의 국력이 더욱 강성해지면서 현실적인 동력을 잃고 서인 정권의 명분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
[예제 문제 및 정답과해설]
1. 다음에서 설명하는 조선 전기의 대외 정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조선은 명과는 조공과 책봉 관계를 통해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선진 문물을 수용하였다. 한편, 국경을 침범하는 여진과 왜구에 대해서는 군사적으로 강력히 대응하면서도, 국경 지대에 무역소를 설치하거나 일부 항구를 개방하여 제한된 교역을 허용하는 등 회유책을 함께 사용하였다.
① 위화도 회군
② 사대교린 정책
③ 친명배금 정책
④ 중립 외교 정책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내용은 명에 대한 사대(事大)와 여진, 일본에 대한 교린(交隣) 정책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조선은 강대국인 명과는 안정적인 관계를 추구하고, 주변국과는 강경책과 회유책을 병행하는 실리적인 ‘사대교린’ 정책을 펼쳤습니다.
오답 풀이: ① 위화도 회군은 조선 건국의 계기가 된 사건이며, ③ 친명배금 정책은 인조 때, ④ 중립 외교는 광해군 때의 정책입니다.
2. 다음 전투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은 견내량의 좁은 수로로 적을 유인한 후, 넓은 바다로 나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형을 갖추고 일본 수군을 포위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 승리로 조선은 남해의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① 임진왜란의 첫 승리를 기록한 해전이다.
② 권율이 민관과 함께 일본의 대군을 격퇴하였다.
③ 학익진 전술을 사용하여 일본 수군 주력을 격멸하였다.
④ 13척의 배로 100척이 넘는 적의 함대를 물리쳤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제시된 내용은 이순신의 한산도 대첩(1592)에 대한 설명입니다. 한산도 대첩의 가장 큰 특징은 학익진 전술을 사용하여 일본 수군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는 점입니다.
오답 풀이: ① 임진왜란의 첫 승리는 옥포 해전입니다. ②는 권율의 행주대첩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는 이순신의 명량 해전에 대한 설명입니다.
3. (가)에 들어갈 세력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연이어 패배하고 국왕이 의주로 피란 간 위기 상황에서, (가) 은/는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나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익숙한 지리를 활용한 유격전으로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후방을 교란하여 전세를 바꾸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① 청의 요청으로 나선 정벌에 참여하였다.
② 인조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내었다.
③ 곽재우, 고경명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④ 삼별초를 조직하여 대몽 항쟁을 전개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가)는 임진왜란 당시 활약한 의병(義兵)입니다. 곽재우, 고경명, 조헌, 정문부 등은 대표적인 의병장입니다.
오답 풀이: ①은 효종 때의 조선군(조총 부대)에 대한 설명입니다. ②는 서인 세력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는 고려 시대의 군사 조직입니다.
4. 밑줄 그은 ‘이 정책’이 추진된 시기의 국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명이 후금과의 전투를 위해 조선에 파병을 요청하자, 당시 국왕은 강홍립을 파견하면서도 전황에 따라 신중하게 대처하라고 지시하였다. 이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면서도 신흥 강국인 후금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이 정책의 일환이었다.
① 4군 6진을 개척하여 국경을 확장하였다.
② 친명배금 정책을 내세워 후금과 대립하였다.
③ 전후 복구 사업을 추진하고 대동법을 시행하였다.
④ 청의 치욕을 씻기 위해 북벌 운동을 추진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밑줄 그은 ‘이 정책’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입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양전 사업, 호적 정리 등 전후 복구 사업에 힘썼으며, 경기도에 처음으로 공납 제도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대동법을 시행했습니다.
오답 풀이: ①은 세종, ②는 인조, ④는 효종 때의 사실입니다.
5. 다음 사건이 일어나는 계기가 된 정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후금의 태종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왕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여 항전하였으나, 결국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① 북벌 운동 추진
② 중립 외교 정책
③ 사대교린 정책
④ 친명배금 정책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사건은 병자호란(1636)입니다. 병자호란은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 정권이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폐기하고 명나라와 친하게 지내고 후금(청)을 배척하는 ‘친명배금’ 정책을 추진한 것이 직접적인 원인이 되어 발발했습니다.
6. (가) 전쟁의 결과로 옳지 않은 것은?
왕이 남한산성에서 나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의 예를 올렸다. 이로써 (가) 전쟁은 조선의 패배로 끝났다.
① 조선과 청이 군신 관계를 맺었다.
②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갔다.
③ 조선이 명에 대한 사대 관계를 청산하였다.
④ 나선 정벌을 통해 북방 영토를 확장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가)는 병자호란입니다. 병자호란의 결과 조선은 청과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고(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자들이 인질로 끌려갔으며(②), 명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청에 사대하게 되었습니다(③).
오답 풀이: ④ 나선 정벌은 병자호란 이후 효종이 북벌을 위해 키운 군대가 청의 요청으로 러시아를 정벌한 사건으로, 병자호란의 직접적인 결과로 영토를 확장한 것은 아닙니다.
7. 다음 가상 대화에 나타난 운동을 주도한 국왕의 업적으로 옳은 것은?
송시열: 전하,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 대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저 오랑캐(청)를 정벌해야 하옵니다.
국왕: 경의 뜻이 곧 나의 뜻이오. 군대를 정비하고 성곽을 수리하여 때를 기다릴 것이오.
① 훈민정음을 창제하였다.
② 경국대전을 완성하였다.
③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다.
④ 탕평책을 실시하여 붕당 갈등을 완화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대화의 내용은 북벌(北伐)을 논의하는 것으로, 이 운동을 주도한 국왕은 효종입니다. 효종은 북벌을 위해 군사력을 강화했으며, 이 군대는 청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나선) 정벌에 두 차례 파견되었습니다.
오답 풀이: ①은 세종, ②는 성종, ④는 영조, 정조의 업적입니다.
8. 다음 사건들을 시기 순으로 바르게 나열한 것은?
(가)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하였다. (다) 광해군이 강홍립을 명의 원군으로 파견하였다. (라) 효종이 송시열 등과 함께 북벌을 계획하였다.
① (가) – (나) – (다) – (라)
② (가) – (다) – (나) – (라)
③ (다) – (가) – (나) – (라)
④ (다) – (나) – (라) – (가)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각 사건의 시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 행주대첩: 1593년 (임진왜란 중) (다) 사르후 전투 파병: 1619년 (광해군 재위) (나) 병자호란 (삼전도의 굴욕): 1637년 (인조 재위) (라) 효종의 북벌 운동: 1649년~1659년 (효종 재위) 따라서 시기 순서는 (가) → (다) → (나) → (라) 입니다.
9. 밑줄 그은 ‘왕’의 재위 기간에 있었던 사실로 옳은 것은?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쫓겨난 왕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인 중립 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① 쓰시마섬을 정벌하였다.
② 허준에게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③ 백두산정계비를 세워 국경을 정하였다.
④ 수원 화성을 축조하고 장용영을 설치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밑줄 그은 ‘왕’은 광해군입니다. 광해군은 재위 기간에 허준을 지원하여 의학서인 동의보감을 완성하고 간행하였습니다(1613).
오답 풀이: ①은 세종, ③은 숙종, ④는 정조 때의 사실입니다.
10. (가)에서 (나)로의 사상적 변화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효종 사후, 현실적으로 청을 정벌하기 어렵다는 인식이 확산되면서, 치욕을 갚기 위해 청을 정벌하자는 (가) 북벌론은 점차 쇠퇴하였다. 그 대신 청이 비록 오랑캐의 나라이지만 그들의 발전된 문물과 기술은 적극적으로 배우고 수용해야 한다는 (나) 북학론이 실학자들을 중심으로 대두되었다.
① 명에 대한 의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강화되었다.
② 성리학적 명분론에서 벗어나 실리를 추구하게 되었다.
③ 서인 세력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명분이 되었다.
④ 쇄국 정책을 통해 서양 문물의 유입을 차단하려 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가) 북벌론은 명에 대한 의리와 청에 대한 복수라는 성리학적 명분론에 기반합니다. 반면, (나) 북학론은 청의 현실적인 발전을 인정하고 그들의 문물과 기술을 배워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실용적인 주장입니다. 따라서 이는 성리학적 명분에서 벗어나 국가의 실리를 추구하는 방향으로 사상이 변화했음을 보여줍니다.
오답 풀이: ①, ③은 북벌론에 더 가까운 설명이며, ④는 19세기 흥선대원군 시기의 정책으로 관련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