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사회 경제의 새로운 움직임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거대한 양란(兩亂)을 겪으며 국가 체제가 크게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 이러한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회 구조와 경제 질서 전반에 걸쳐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변화의 물결이 일어났습니다. 본 장에서는 양반 지배층의 분화, 서민 경제의 성장, 그리고 국가의 수취 체제 개편이라는 세 가지 축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의 역동적인 변화상을 심도 있게 탐구해 보겠습니다.
1. 지배층의 변동과 신분 질서의 동요
전란 이후 사회 재편 과정에서 조선의 근간을 이루던 신분 질서는 크게 흔들렸습니다. 특히 지배층인 양반 내에서도 심각한 분화가 나타났습니다.
- 양반층의 분화
조선 후기에는 납속책, 공명첩 발급 등으로 양반의 수가 급증하였으나, 한정된 관직과 토지를 둘러싼 경쟁은 더욱 치열해졌습니다. 이 과정에서 양반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었습니다.
- 벌열(閥閱) 양반 (권반): 중앙 정계의 핵심 권력을 장악한 소수의 가문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특정 붕당(주로 노론)을 중심으로 고위 관직을 독점하며 막대한 부와 권력을 세습했습니다.
- 향반(鄕班):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자신들의 생활 근거지인 향촌에 머무른 양반들입니다. 이들은 수령의 자문 역할을 하거나 향촌 사회의 여론을 주도하며 지역 내에서는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으나, 경제적으로는 점차 몰락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 잔반(殘班): 권력과 경제적 기반을 모두 상실한 몰락한 양반입니다. 이들은 직접 농사를 짓거나 상업, 수공업에 종사하며 생계를 유지해야 했으며, 사실상 상민과 다를 바 없는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이러한 양반층의 분화는 조선 사회의 신분제가 더 이상 고정불변의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현상이었습니다.
2.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조선 후기 경제 변화의 가장 큰 특징은 자급자족적인 농업 경제에서 벗어나 상품의 생산과 유통이 활발해지는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했다는 점입니다.
- 농업 기술의 발달과 농민층의 분화
- 모내기법(이앙법)의 전국적 확산: 노동력을 획기적으로 절감하고(김매기 노동력 감소) 단위 면적당 생산량을 크게 늘릴 수 있는 모내기법이 널리 보급되었습니다. 또한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해져 토지 이용 효율도 높아졌습니다.
- 광작(廣作)의 성행: 모내기법으로 인해 소수의 인원으로도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에 일부 농민(부농)은 토지를 사들이거나 임차하여 대규모로 농사를 짓는 광작을 통해 부를 축적했습니다.
- 농민층의 분화: 광작의 유행은 대다수 소농(小農)이 경작지를 잃고 임노동자나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이로써 부농, 자영농, 소작농, 임노동자 등으로 농민층이 뚜렷하게 분화되었습니다.
- 상업과 수공업의 변화
- 사상(私商)의 성장: 정부의 허가를 받은 시전 상인의 통제를 벗어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하는 사상(私商)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개성의 송상, 의주의 만상, 한양의 경강상인 등은 전국적인 유통망을 구축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습니다.
- 장시(場市)의 확대와 포구(浦口)의 발달: 전국적으로 5일장과 같은 정기 시장인 장시가 활성화되었으며, 일부는 상설 시장으로 발전했습니다. 또한 세곡이나 상품 운송의 중심지였던 포구는 상업의 중심지로 번성했습니다.
- 화폐 유통의 활성화: 숙종 때 주조된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전국적으로 유통되면서 세금 납부, 소작료 지불, 임금 지급 등 모든 경제 활동에 화폐가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상품 거래를 더욱 촉진시키는 역할을 했습니다.
- 민영 수공업의 발달: 이전까지 관청에 소속되어 물품을 생산하던 관영 수공업이 쇠퇴하고, 독자적으로 물품을 생산하여 판매하는 민영 수공업이 발달했습니다. 특히 상인 자본가가 수공업자에게 원료와 자금을 미리 대주고 생산된 제품을 가져가는 선대제(先貸制) 수공업이 유행했습니다.
3. 국가 재정의 새로운 활로, 수취 체제 개편
조선 정부는 양란 이후 황폐해진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과도한 세금으로 고통받는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수취 체제(세금 제도) 개편을 단행했습니다.
- 영정법(永定法) – 전세(田稅)의 정액화
- 배경: 기존의 전세는 풍년과 흉년에 따라 세율이 달라지는 연분9등법을 따랐으나, 운영이 복잡하고 관리의 부정이 심했습니다.
- 내용 (인조):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 1결(結)당 미곡 4두(斗)로 세율을 고정했습니다.
- 결과: 전세 자체의 부담은 다소 줄었으나, 각종 부가세(수수료, 운송비 등)가 여전히 남아있어 농민의 부담을 획기적으로 줄이지는 못했습니다.
- 대동법(大同法) – 공납(貢納)의 전세화
- 배경: 집집마다 토산물을 바치던 공납은, 현지에서 나지 않는 물품이 부과되거나 관리들이 중간에서 이익을 가로채는 방납(防納)의 폐단이 극심하여 농민에게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 내용 (광해군): 공납을 폐지하고 토지를 기준으로 1결당 쌀 12두를 걷도록 했습니다. (산간 지역은 포(布)나 돈(錢)으로 납부)
- 결과:
- 농민의 공납 부담이 크게 줄었고, 토지가 없는 농민은 세금 부담에서 벗어났습니다.
- 정부는 쌀, 포, 돈을 공인(貢人)이라는 어용상인에게 지급하여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게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공인들이 대량으로 상품을 구매하면서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을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경기도에서 처음 시작되어 전국적으로 확대되기까지 약 100년이 걸렸습니다.
- 균역법(均役法) – 군역(軍役) 부담의 완화
- 배경: 양인 장정들이 1년에 2필씩 내던 군포(軍布)는 양반층의 면제와 농민의 도망으로 인해 남아있는 농민에게 과도한 부담이 되었습니다.
- 내용 (영조): 장정 1인당 군포 부담을 1년에 2필에서 1필로 줄여주었습니다.
- 결과 및 보완책: 군포 수입이 절반으로 줄어들자, 정부는 재정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다음과 같은 보완책을 마련했습니다.
- 결작(結作): 지주(땅 주인)에게 토지 1결당 쌀 2두를 추가로 걷었습니다.
- 어염선세: 어장세, 소금세, 선박세 등 잡세 수입을 국가 재정으로 귀속시켰습니다.
- 선무군관포: 일부 부유한 상민에게 선무군관이라는 명예직을 주고 군포 1필을 징수했습니다.
- 의의: 농민의 군역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부족분을 지주에게 일부 전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예제 문제 및 정답과해설]
1. 다음 자료에 나타난 농업 기술의 확산으로 인해 나타난 사회 변화로 가장 적절한 것은?
이전에는 직접 밭에 볍씨를 뿌려 물을 대니 잡초가 벼와 함께 자라 김매기에 드는 품이 너무 많았다. 이제는 못자리에서 싹을 틔워 옮겨 심으니, 수확량도 늘고 잡초 제거도 쉬워졌다. 이로 인해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땅이 크게 늘어났다.
① 국가의 토지 소유가 확대되는 관전(官田)이 늘어났다.
② 일부 농민이 넓은 토지를 경작하는 광작(廣作)이 유행하였다.
③ 지주와 소작농이 수확량을 절반씩 나누는 병작반수제가 폐지되었다.
④ 2년 3작의 윤작법이 보급되어 밭농사 생산량이 증대되었다.
⑤ 황무지 개간을 장려하는 진흥책이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자료는 모내기법(이앙법)의 장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내기법은 노동력을 절감시켜 한 사람이 더 넓은 면적을 경작할 수 있게 하였고, 이는 소수의 부농이 토지를 집중적으로 경작하는 광작(廣作)의 성행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답 풀이: ① 관전 확대는 고려 말~조선 초의 현상입니다. ③ 병작반수제는 조선 후기에도 일반적인 소작 형태였습니다. ④ 윤작법은 고려 시대부터 보급된 밭농사 기술입니다. ⑤ 황무지 개간 장려는 여러 시대에 걸쳐 나타났으며, 자료의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적습니다.
2. 밑줄 그은 ‘이 제도’의 시행 결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광해군 때 경기도에서 처음 시작된 이 제도는 기존에 집집마다 특산물을 걷던 방식의 폐단이 커서 이를 토지 결수를 기준으로 쌀로 통일하여 걷는 방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로 인해 왕실과 관청에 물품을 조달하는 새로운 상인층이 등장하여 활동하였다.
<보기>
ㄱ.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하였다. ㄴ.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지주에게 결작을 부과하였다. ㄷ. 어용 상인인 공인(貢人)이 등장하여 상품 경제를 촉진하였다. ㄹ. 토지가 없는 농민은 세금 부담에서 벗어나는 효과가 있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ㄷ
④ ㄴ, ㄹ
⑤ ㄷ, 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자료는 공납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토지 1결당 쌀 12두를 징수한 대동법(大同法)에 대한 설명입니다. 대동법 시행으로 정부는 쌀을 받아 공인(貢人)에게 주고 필요한 물품을 구매하게 하여 상품 경제 발달을 촉진했다(ㄷ). 또한, 대동법은 토지를 기준으로 부과되었으므로 토지가 없는 농민은 공납의 부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ㄹ).
오답 풀이: ㄱ은 영정법, ㄴ은 균역법의 보완책에 대한 설명입니다.
3. (가) 제도의 시행으로 인한 재정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정책으로 옳은 것은?
영조는 오랫동안 논의되어 온 군역의 폐단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이에 양인 장정이 1년에 2필씩 내던 군포를 1필로 줄여주는 (가) 제도를 단행하였다.
①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숨겨진 토지(은결)를 찾아냈다.
② 지주에게 토지 1결당 쌀 2두의 결작(結作)을 징수하였다.
③ 호(戶)를 기준으로 포를 징수하는 호포법을 시행하였다.
④ 특정 어장의 이익을 독점하는 도고(都賈)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⑤ 5가구를 하나로 묶어 세금을 연대 책임지게 하는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제시된 (가) 제도는 영조 때 시행된 균역법입니다. 균역법은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줄여주었기 때문에 국가 재정이 감소하는 문제가 발생했습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정부는 지주에게 결작(1결당 2두)을 징수하고, 어염선세 등을 국가 재정으로 귀속시켰습니다.
오답 풀이: ① 양전 사업은 여러 왕 대에 걸쳐 시행되었으나 균역법의 직접적인 보완책은 아닙니다. ③ 호포법은 흥선대원군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기 위해 시행한 정책입니다. ④ 도고 금지는 사상의 성장을 억제하기 위한 정책으로, 정조 때 일부 완화(통공정책)되기도 했습니다. ⑤ 오가작통법은 인구 파악과 통제를 위한 제도입니다.
4. 다음에서 설명하는 조선 후기 사회 계층은?
이들은 신분상 양반이었으나, 중앙 정계에서 밀려나 향촌에 거주하며 지역 사회에서 영향력을 유지하려 하였다. 하지만 새롭게 부를 축적한 부농이나 상인층의 도전을 받으며 점차 경제적 기반과 사회적 지위를 위협받았다.
① 벌열
② 잔반
③ 향리
④ 향반
⑤ 서리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자료는 중앙 권력에서는 소외되었으나 향촌 사회에서 지위를 유지하던 향반(鄕班)에 대한 설명입니다. 이들은 기존의 향촌 지배 질서를 지키려 했으나, 조선 후기 경제 변화 속에서 성장한 새로운 세력(신향)과 대립(향전)하기도 했습니다.
오답 풀이: ① 벌열은 중앙 권력을 독점한 양반 가문입니다. ② 잔반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몰락한 양반입니다. ③ 향리는 수령을 보좌하는 지방의 행정 실무 계층입니다. ⑤ 서리는 중앙 관청의 하급 관리입니다.
5. 조선 후기 상업 발달에 대한 설명으로 옳지 않은 것은?
① 개성의 송상은 전국에 지점을 설치하여 상업 활동을 하였다.
② 숙종 때 주조된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유통되었다.
③ 상품 운송의 중심지였던 포구가 상업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④ 정부의 허가를 받은 시전 상인이 상업 활동을 독점하였다.
⑤ 상인 자본가가 수공업자에게 자금과 원료를 대주는 선대제가 유행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조선 후기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시전 상인 외에 허가 없이 활동하는 사상(私商)이 크게 성장하여 시전 상인의 독점적 지위를 위협했습니다. 따라서 시전 상인이 상업 활동을 독점했다는 설명은 틀립니다. 송상(개성), 만상(의주), 경강상인(한양) 등 사상의 활동이 매우 활발했습니다.
6. 밑줄 그은 ‘이 세법’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인조 때 시행된 이 세법은 기존의 복잡한 전세 수취 방식을 개혁하여, 토지 1결당 생산량이나 풍흉에 관계없이 고정된 액수를 납부하게 한 것이다.
① 1결당 쌀 12두를 납부하도록 하였다.
② 토지 비옥도에 따라 6등급으로 나누어 차등 과세하였다.
③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근거가 되었다.
④ 전세를 토지 1결당 쌀 4두로 고정하였다.
⑤ 공인의 등장을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밑줄 그은 ‘이 세법’은 전세를 풍흉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4두로 고정한 영정법(永定法)입니다.
오답 풀이: ①은 대동법, ②는 조선 초기 세종 때 시행된 공법(전분6등법)에 대한 설명입니다. ③은 흥선대원군의 호포법, ⑤는 대동법의 결과입니다.
7. (가) 인물의 활동이 활발해진 배경이 된 제도는?
우리는 왕실과 관아에 필요한 물품을 대는 일을 하오. 나라에서 쌀이나 돈을 받으면, 전국 각지의 장시를 돌며 필요한 물건을 대량으로 사들여 납품하지. 우리 덕분에 물건을 만드는 수공업자들도 살 맛이 나고, 전국의 물화가 활발히 유통된다오.
① 과전법
② 직전법
③ 영정법
④ 균역법
⑤ 대동법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⑤
해설: 제시된 자료의 (가) 인물은 정부로부터 자금을 받아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는 공인(貢人)입니다. 공인은 대동법의 시행으로 등장하였습니다. 대동법은 기존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걷었고, 정부는 이 쌀을 공인에게 지급하여 관수품을 조달하게 했습니다.
오답 풀이: ① 과전법과 ② 직전법은 조선 전기의 토지 제도입니다. ③ 영정법은 전세 개혁이며, ④ 균역법은 군역 개혁으로 공인의 활동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적습니다.
8. 조선 후기 경제 상황에 대한 학생들의 대화 내용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은?
학생 1: 모내기법이 보급되면서 노동력이 절감되었고, 일부 농민은 광작을 통해 부농으로 성장했어.
학생 2: 맞아, 하지만 대다수 농민은 토지를 잃고 소작농이나 도시의 임노동자로 전락하기도 했지.
학생 3: 상업에서는 의주의 만상이 대청 무역으로, 동래의 내상이 대일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어.
학생 4: 하지만 화폐 경제는 발달하지 못해서 여전히 쌀이나 옷감이 주요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었어.
① 학생 1
② 학생 2
③ 학생 3
④ 학생 4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학생 4의 설명은 옳지 않습니다. 조선 후기에는 숙종 때 발행된 상평통보가 전국적으로 널리 유통되면서 세금 납부, 상품 거래 등 경제 생활 전반에 화폐가 활발하게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 상품 화폐 경제 발달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학생 1, 2, 3의 설명은 모두 조선 후기의 올바른 경제 상황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9. 다음은 조선 후기 신분 계층의 변화를 나타낸 것이다. (가)에 들어갈 내용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 • 권력과 부를 독점한 중앙의 벌열
- • 향촌 사회의 지배력을 유지하던 향반
- • ( 가 )
- • 신분 상승을 꾀하던 부유한 상민과 부농
① 공명첩이나 납속을 통해 합법적으로 신분을 상승시킨 노비
② 관직 진출은 막혔으나 전문 기술로 부를 쌓은 중인층
③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농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던 잔반
④ 수령을 보좌하며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향리층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제시된 내용은 조선 후기 양반층의 분화와 신분 질서의 동요를 보여줍니다. 권력 양반인 벌열, 지방 양반인 향반 다음으로 와야 할 계층은 경제적으로 완전히 몰락하여 상민과 다를 바 없게 된 잔반(殘班)입니다. 이들은 양반 신분 내에서 최하층을 형성했습니다.
오답 풀이: ①, ②, ④는 양반층의 분화와는 다른 범주의 신분 계층에 대한 설명입니다.
10. 다음 정책들이 시행된 시기의 사회 모습으로 볼 수 없는 것은?
• 영정법: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함 • 대동법: 공물을 1결당 쌀 12두로 통일함 • 균역법: 군포를 1년에 1필로 줄임
① 담배, 고추 등 상품 작물을 재배하는 농가
② 송파장에서 물건을 팔고 있는 보부상
③ 청화백자를 제작하고 있는 관영 수공업자
④ 한글 소설을 돈을 주고 빌려보는 여인
⑤ 광산 개발에 투자하여 부를 축적하는 상인(덕대)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제시된 정책들은 모두 조선 후기에 시행된 수취 체제 개편입니다. 이 시기에는 관청에 소속되어 물품을 제작하는 관영 수공업은 쇠퇴하고, 독립적으로 물품을 만들어 파는 민영 수공업이 발달하였습니다. 따라서 청화백자를 제작하는 ‘관영’ 수공업자의 모습은 조선 후기 경제 변화의 흐름과는 거리가 멀다.
오답 풀이: ① 상품 작물 재배, ② 장시의 발달, ④ 한글 소설 등 서민 문화의 유행, ⑤ 민간에 의한 광산 개발(덕대 경영)은 모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사회 경제적 모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