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사회의 전개(흥선 대원군)
1. 흥선 대원군 의 개혁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
19세기 후반, 조선은 안으로는 세도정치의 폐단으로 왕권이 실추되고 삼정의 문란으로 민생이 파탄에 이르렀으며, 밖으로는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이양선 출몰)로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이러한 총체적 위기 상황 속에서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그의 아버지인 흥선 대원군 이하응이 섭정을 시작하며 강력한 개혁 정치와 쇄국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1. 대내적 개혁: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
흥선 대원군은 실추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을 목표로 다방면에 걸친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1) 왕권 강화와 중앙 통치 기구 정비
- 세도정치 타파: 안동 김씨 등 특정 가문이 독점하던 권력을 회수하고, 당파나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세도정치의 기반을 무너뜨렸습니다.
- 통치 기구 개혁:
- 비변사(備邊司) 폐지 및 기능 축소: 조선 후기 최고 권력 기구로 변질된 비변사의 기능을 의정부와 삼군부로 이관했습니다. 의정부는 행정을, 삼군부는 군사를 담당하게 하여 왕권을 중심으로 국정 운영 체계를 재확립했습니다.
- 법전 편찬: 국가 통치 규범을 재정비하기 위해 『대전회통』과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여 법치 질서를 확립하고자 했습니다.
- 경복궁 중건(重建): 임진왜란 때 불탄 이후 폐허로 남아 있던 경복궁을 다시 지어 왕실의 위엄을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 의의: 실추된 왕권을 과시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는 상징적 조치였습니다.
- 문제점: 막대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원납전(願納錢)이라는 기부금을 강제로 징수하고, 당백전(當百錢)이라는 고액 화폐를 발행하여 물가를 폭등시키는 등 경제적 혼란을 야기했습니다. 또한, 공사에 백성을 강제 동원하고 양반의 묘지림까지 벌목하여 백성과 양반 모두의 불만을 샀습니다.
(2)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 확충
- 서원(書院) 철폐: 당시 서원은 면세·면역의 특권을 누리며 지방 양반 세력의 근거지 역할을 했고, 백성을 수탈하는 등 폐단이 심각했습니다. 대원군은 전국의 서원 중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지방 사림 세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이때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백성을 해치는 자는 용서할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단호한 의지를 보였습니다.
- 삼정(三政)의 개혁:
- 양전(量田) 사업: 토지대장(양안)에서 누락된 토지(은결)를 찾아내어 전정(田政)의 문란을 바로잡고자 했습니다.
- 호포법(戶布法) 실시: 군정(軍政)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해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법을 시행했습니다. 이는 ‘양반은 군역을 지지 않는다’는 기존의 특권을 없앤 것으로, 신분 질서에 구애받지 않는 조세 평등의 원칙을 일부 적용한 획기적인 조치였으나 양반층의 거센 반발을 샀습니다.
- 사창제(社倉制) 실시: 고리대로 변질된 환곡(還穀)의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 마을 단위로 곡식을 저장하고 자율적으로 운영하는 사창제를 부활시켜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었습니다.
2. 대외 정책: 통상 수교 거부와 척화비 건립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접근을 제국주의적 침략으로 규정하고, 문호를 굳게 닫는 ‘통상 수교 거부 정책(쇄국 정책)’으로 일관했습니다.
(1) 병인박해와 병인양요(1866년)
- 배경: 대원군은 초기에는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 선교사를 통해 프랑스와의 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이후 천주교가 사회 질서를 어지럽힌다고 판단하여 프랑스 선교사 9명과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를 처형하는 병인박해를 일으켰습니다.
- 전개 (병인양요): 병인박해를 구실로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했습니다.
- 한성근 부대가 문수산성에서, 양헌수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며 결사적으로 항전했습니다.
- 결과: 프랑스군은 큰 성과 없이 퇴각했으나, 이 과정에서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외규장각 도서 등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습니다.
(2)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년)과 신미양요(1871년)
- 배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에서 통상을 요구하며 행패를 부리자, 평양 관민이 배를 불태워 침몰시킨 사건입니다.
- 전개 (신미양요): 미국은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빌미로 군함을 이끌고 강화도를 침략했습니다.
- 조선군은 어재연 장군이 이끄는 부대가 광성보에서 미군에 맞서 치열하게 싸웠으나, 수적 열세와 무기의 차이로 대부분 전사했습니다.
- 결과: 미군은 조선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별다른 소득 없이 스스로 물러났습니다. 당시 어재연 장군의 부대 깃발인 ‘수자기(帥字旗)’는 미군에게 빼앗겼다가 2007년에 장기 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었습니다.
(3)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충남 덕산에 있는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 남연군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조선인의 서양인에 대한 반감을 극도로 증폭시켰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4) 척화비(斥和碑) 건립
신미양요에서 미군을 물리쳤다고 판단한 흥선 대원군은 자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자신감을 얻고, 이를 전국에 알리기 위해 척화비를 건립했습니다. 척화비에는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의미로, 쇄국의지를 천명한 상징물입니다.
[종합 평가]
흥선 대원군의 정책은 세도정치의 폐단을 바로잡고 민생을 안정시켜 내부적 위기를 극복하려 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됩니다. 그러나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문호를 굳게 닫음으로써 조선의 근대화를 지연시켰다는 부정적 평가도 함께 받고 있습니다.
[예제 문제 및 정답과해설]
1. 다음 정책들을 추진한 인물의 활동으로 옳은 것은?
• 세도 정치의 핵심 기구였던 비변사를 혁파하였다.
• 양반에게도 군포를 부과하는 호포법을 시행하였다.
• 전국의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다.
① 나선 정벌에 조총 부대를 파견하였다.
② 규장각을 설치하여 친위 세력을 육성하였다.
③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당하는 계기가 된 사건에 맞서 싸웠다.
④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을 설치하였다.
⑤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고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제시된 정책(비변사 혁파, 호포법 시행, 서원 철폐)은 모두 흥선 대원군이 추진한 국내 개혁입니다. ③ 병인양요는 흥선 대원군 집권기에 발생했으며, 이 사건으로 프랑스군이 외규장각 도서를 약탈해 갔습니다. 흥선 대원군은 이 침략에 맞서 싸웠습니다.
오답 풀이:
① 나선 정벌은 효종 때의 일입니다.
② 규장각 설치는 정조의 업적입니다.
④ 통리기무아문 설치는 1880년(고종 친정)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이루어졌습니다.
⑤ 별기군 창설과 수신사 파견은 강화도 조약 이후 개화 정책의 일환입니다.
2. (가) 사업의 추진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으로 옳지 않은 것은?
왕실의 위엄을 되살리고자 경복궁을 다시 짓는 (가) 사업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막대한 공사 비용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① 원납전이라는 이름으로 기부금을 강제로 징수하였다.
② 부족한 재정을 메우기 위해 당백전을 발행하여 물가 폭등을 유발하였다.
③ 공사에 필요한 목재를 확보하기 위해 양반들의 묘지림까지 벌목하였다.
④ 결두전이라는 이름으로 토지에 부가세를 징수하였다.
⑤ 균역법을 시행하여 양반의 군포 부담을 줄여주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⑤
해설: (가)는 경복궁 중건입니다. 경복궁 중건의 재원 마련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점은 ① 원납전 강제 징수, ②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인플레이션, ③ 양반 묘지림 벌목, ④ 결두전·문세 등의 추가 세금 징수가 있습니다.
오답 풀이:
⑤ 균역법은 영조 때 시행된 정책으로, 농민의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여준 것입니다. 오히려 흥선 대원군은 호포법을 통해 양반에게 군포를 부과했습니다.
3. 다음 사건이 일어난 시기를 연표에서 옳게 고른 것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하자, 흥선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하였다. 이 사건으로 조선의 대외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가) 병인박해 (나) 병인양요 (다) 신미양요 (라) 운요호 사건
① (가)와 (나) 사이
② (나)와 (다) 사이
③ (다)와 (라) 사이
④ (라) 이후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1868년에 발생했습니다.
주요 사건의 연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 병인박해, 병인양요: 1866년
• 오페르트 도굴 사건: 1868년
• 신미양요: 1871년
• 운요호 사건: 1875년
따라서 오페르트 도굴 사건은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 사이에 위치합니다.
4. 밑줄 그은 ‘이 비석’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고른 것은?
신미양요 이후, 흥선 대원군 은 자신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한 의지를 널리 알리고자 전국 각지에 이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보기>
ㄱ.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다.
ㄴ. 병인양요를 겪은 직후에 전국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ㄷ. 조선의 쇄국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상징물이다.
ㄹ. 고종의 친정이 시작되면서 전국 각지에서 철거되었다.
① ㄱ, ㄴ
② ㄱ, ㄷ
③ ㄴ, ㄹ
④ ㄷ, ㄹ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②
해설: 밑줄 그은 ‘이 비석’은 척화비입니다.
ㄱ, ㄷ. 척화비에는 본문에 언급된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흥선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 의지를 상징합니다.
오답 풀이:
ㄴ. 척화비는 병인양요(1866)가 아닌 신미양요(1871) 직후에 건립되었습니다.
ㄹ. 고종의 친정 시작(1873)이 아니라, 임오군란(1882) 이후 청의 간섭을 받으며 개화 정책이 본격화될 때 철거되었습니다.
5. 다음 전투를 이끈 장군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미국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하자, 그는 광성보에서 결사 항전하였다. 전투가 치열해지자 그의 동생인 재순도 함께 싸우다 전사했으며, 그가 사용하던 장군기인 ‘수자기(帥字旗)’는 미군에게 노획되었다.
① 문수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②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③ 제너럴 셔먼호 격침을 주도하였다.
④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을 지휘하였다.
⑤ 부산진 전투에서 왜군에 맞서 싸우다 순절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자료는 신미양요 당시 광성보 전투와 어재연 장군에 대한 설명입니다. ④ 어재연은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 광성보에서 미군에 맞서 싸운 지휘관입니다.
오답 풀이:
① 문수산성 전투는 병인양요 때의 한성근입니다.
② 정족산성 전투는 병인양요 때의 양헌수입니다.
③ 제너럴 셔먼호 격침은 당시 평양 감사였던 박규수와 평양 관민이 주도했습니다.
⑤ 부산진 전투는 임진왜란 때의 정발입니다.
6. (가), (나)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가) 프랑스가 천주교 박해를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나) 미국이 제너럴 셔먼호 사건을 구실로 강화도를 침략하였다.
① (가)의 결과, 강화도 조약이 체결되었다.
② (나)로 인해 외규장각 도서가 약탈당했다.
③ (가)에서는 양헌수가 정족산성에서 항전했다.
④ (나)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⑤ (가), (나) 모두 조선이 서양과 수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가)는 병인양요, (나)는 신미양요입니다. ③ 병인양요 당시 양헌수가 이끈 부대가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는 큰 전과를 올렸습니다.
오답 풀이:
① 강화도 조약은 운요호 사건(1875)을 계기로 체결되었습니다.
② 외규장각 도서는 (가) 병인양요 때 프랑스군에게 약탈당했습니다.
④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은 (나) 신미양요(1871)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조선의 쇄국 정책을 강화시키는 독립된 사건입니다.
⑤ 두 사건 모두 조선의 쇄국 정책을 더욱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7. 다음 가상 대화에 나타난 정책에 대한 설명으로 가장 적절한 것은?
양반 A: 아니, 대감! 대대로 군역을 면제받아 온 우리 사대부에게 군포를 내라니, 이게 당키나 한 말이오?
관리 B: 나랏법이 바뀌었소이다. 이제부터는 집집마다 포를 내야 하니, 이를 호포(戶布)라 합니다. 양반이라고 예외는 없습니다.
① 부족한 국가 재정을 보충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② 지주에게 결작미를 2두씩 징수하였다.
③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세금을 차등 부과하였다.
④ 일부 상류층에게 선무군관포를 징수하였다.
⑤ 풍흉에 관계없이 전세를 1결당 4두로 고정하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①
해설: 대화의 내용은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법에 대한 것입니다. 호포법은 군정의 문란을 시정하고, 면세 특권을 누리던 양반에게도 세금을 부과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려는 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오답 풀이:
② 결작미 징수는 영조 때 균역법의 재정 보충책입니다.
③ 세금을 차등 부과한 것은 세종 때의 공법(전분6등법, 연분9등법)입니다.
④ 선무군관포는 균역법의 재정 보충책 중 하나입니다.
⑤ 1결당 4두 고정은 인조 때 시행된 영정법입니다.
8. (가)에 들어갈 사건으로 옳은 것은?
병인박해 → 제너럴 셔먼호 사건 → 병인양요 → (가) → 신미양요 → 척화비 건립
① 운요호 사건
② 갑신정변
③ 임오군란
④ 오페르트 도굴 사건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흥선 대원군 집권기 주요 사건의 순서는 다음과 같습니다.
병인박해(1866.1) →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8) → 병인양요(1866.10) →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 신미양요(1871) → 척화비 건립(1871) 순서로 전개되었습니다.
따라서 (가)에는 오페르트 도굴 사건이 들어가는 것이 옳습니다.
9. 흥선 대원군의 정책에 대한 평가로 가장 거리가 먼 것은?
① 안동 김씨 등 세도 가문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② 삼정의 문란을 시정하여 농민의 부담을 덜어주었다.
③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근대화를 추진하였다.
④ 법전 편찬을 통해 국가의 통치 질서를 재확립하고자 하였다.
⑤ 외세의 침략에 맞서 싸우며 민족적 자주의식을 높였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③
해설: 흥선 대원군은 서양 세력의 접근을 침략으로 규정하고 통상 수교를 거부하는 쇄국 정책을 고수했습니다. 따라서 서양 문물을 적극 수용하여 근대화를 추진했다는 설명은 흥선 대원군의 정책 방향과 정반대이며, 이는 강화도 조약 이후 추진된 개화 정책에 해당합니다. 나머지 보기 ①, ②, ④, ⑤는 모두 흥선 대원군 정책의 내용 또는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10. 다음 자료와 관련된 사건의 결과로 옳은 것은?
로즈 제독이 이끄는 함대는 강화부를 점령하고,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과 정족산성에서 격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강화도에 보관 중이던 왕실 서적과 귀중품들을 무참히 약탈하여 돌아갔다.
①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조약이 체결되었다.
② 흥선 대원군이 하야하는 계기가 되었다.
③ 어재연 장군이 광성보에서 전사하였다.
④ 외규장각에 있던 의궤 등 문화재를 빼앗겼다.
⑤ 조선 정부 내에서 통상 개화론이 힘을 얻었다.
정답과 해설 보기
정답: ④
해설: 제시된 자료는 프랑스 함대(로즈 제독), 양헌수의 정족산성 항전 등을 통해 병인양요임을 알 수 있습니다.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은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하고 퇴각하면서 강화도에 있던 외규장각의 의궤 등 수많은 문화재를 약탈해 갔습니다.
오답 풀이:
① 조불 수호 통상 조약은 1886년에 체결되었습니다.
② 흥선 대원군은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는 최익현의 상소 등으로 1873년에 하야했습니다.
③ 어재연 장군 전사는 신미양요 때의 일입니다.
⑤ 병인양요 이후 조선의 쇄국 정책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